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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빨갱이라 자조했던 반항아들 "촛불 들고 당당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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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가 열린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 청계광장 한 빌딩 앞에서 당시 김제 지평선고 2학년이던 김수민(19)양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이 학교 1~3학년 남녀 학생 40여 명이 상경해 촛불을 들었다. [사진 김수민양]

촛불문화제가 열린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 청계광장 한 빌딩 앞에서 당시 김제 지평선고 2학년이던 김수민(19)양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이 학교 1~3학년 남녀 학생 40여 명이 상경해 촛불을 들었다. [사진 김수민양]
촛불문화제가 열린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 청계광장 한 빌딩 앞에서 당시 김제 지평선고 2학년이던 정지우(19)군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김수민양]

"탄핵 전에는 세월호 희생자 추모 행사 등을 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왠지 반항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컸어요. 심지어 우리끼리 스스로 '빨갱이' '종북 좌파'라고 자조했는데 요즘은 저희가 하는 행동에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진 점에서 아주 행복합니다."
1년 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전북 김제의 대안학교인 지평선고등학교 3학년 김수민(19)양의 말이다. 김양 등 김제 지평선고 1~3학년 남녀 학생 40여 명은 지난해 11월 12일 청계광장의 한 빌딩 앞에서 목청껏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쳤다. 이날은 지난해 10월 29일 촛불집회 시작 이후 처음으로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광화문에 모인 날이다.

전북 김제지평선고 3학년 김수민양 촛불 1년 후 #학교 학생 40여명, 작년 11월 광화문집회 참여 #시국선언문 전교생 120명 중 80여명 이름 올려 #김양 "그땐 최고 권력에 저항하는 행사라 걱정" #성공 이후 사회 이슈 있을 때마다 목소리 내 #'백남기 농민 추모' 등 할일 찾아 하는 분위기 #이런 의식담은 작품으로 전국청소년연극제 대상 #김양 "외신선 촛불집회로 민주주의 잘 실현하는 #나라로 소개하지만 현실은 약자 차별·혐오 여전"

지평선고 학생들은 본인들이 직접 작성해 온 A4 1장 분량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해 거리에 나온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시국선언문에는 이 학교 전교생 120여 명 중 8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학생들은 시국선언문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자명한 원칙이 무너졌다"며 민주주의 회복에 힘을 보탰다.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간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간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당시 지평선고 학생 대표로 나선 김양은 1년 전 촛불을 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저희 학교는 대안 학교다 보니 일반 인문계 학교보다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많아요.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도 수업할 정도로요. 그런데 정작 앉아서 말만 하고 있는 게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인가 회의를 품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이런 감상을 나누다가 우리도 다 함께 (광화문광장에) 가보자고 의견을 모아 같이 시국선언문을 썼어요."

당시만 해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권력이 서슬퍼럴 때였는데 두려움은 없었을까. 김양은 "국가 최고 권력에 저항하는 행사인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촛불집회를 무사히 마치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도 크든 작든 부정하고 불평등한 일에 대해 감시하고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김양은 전했다. 수업 시간에 발표 기회가 한 학생에게만 집중되면 선생님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식이다.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가는 버스 안에서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가는 버스 안에서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평선고 학생들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숨진 고(故) 백남기 농민의 추모 행사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이나 시 등을 전시하고 카드뉴스와 대자보를 만들어 이 사실을 알리는 노력이다.

최근에는 교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 모금운동도 하고 있다. 김양은 "학년 구분이나 대표 없이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같이 모여 토론하고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학교가 대학 입시를 위해 다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민주 시민으로서 준비하고 역할을 배우는 곳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간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지난 5월 전북 군산으로 인문체험학습을 간 김제지평선고 3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김수민양]

김양이 연출을 맡은 이 학교 연극부 '아피시오나토'는 올해 '엑스엑스라지(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란 작품으로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레오타드(leotard)는 무용수 등이 입는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이고, 안나수이는 명품 패션 브랜드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꼬집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선정한 데도 촛불집회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한 연극부 1~3학년 17명 상당수가 지난해 촛불집회 멤버이거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김양은 "외신에서는 우리 사회가 촛불집회를 통해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주의를 잘 실현하고 있는 나라라고 소개하는데 그 속을 보면 여전히 동성애 등 우리 사회 통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혐오가 많은 현실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수민양(사진 왼쪽) 등 김제지평선고 연극부 '아파시오나토' 학생들. 올해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문제 의식을 담은 '엑스엑스라니(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란 작품으로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사진 김수민양]

김수민양(사진 왼쪽) 등 김제지평선고 연극부 '아파시오나토' 학생들. 올해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문제 의식을 담은 '엑스엑스라니(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란 작품으로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사진 김수민양]

촛불집회 이후 달라진 건 학교뿐만이 아니다. 집에서도 가족끼리 '갑론을박'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강원도 춘천이 집인 김양은 "촛불집회 이후 JTBC 뉴스를 보면서 '인천 여아 살해 사건' 등을 놓고 아버지·어머니와 대한민국 법과 정의에 대해 얘기했다"고 했다. 김양은 1남1녀 중 장녀로 아버지 김진수(47)씨는 지역 지상파방송 PD이고, 어머니 이미옥(45)씨는 어린이집 교사다. 김양은 "가족이라도 서로 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 같은 주제인데도 의견이 부딪치기도 하지만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했다.

촛불집회는 김양의 대입 진로를 결정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애초 연극영화과를 준비 중이었던 김양은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대변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철학과나 사회학과 진학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새 정부가 하는 일이 모두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김양은 "(문재인) 정부 초기에 위장 전입 등으로 장관이 낙마하는 인사 문제 때문에 말이 많았다. 수업 시간에 이런 위장 전입에 대해 우리가 (지지한 대통령이니) 그럼에도 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더 날카롭게 바라봐야 하는가 토론도 하고 글도 썼다"며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제 끝났다'고 만족할 게 아니라 새 정부가 무너진 민주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감시하고, 민주 시민으로서 역할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박 전 대통령이 재판 출석을 거부하고, 일부 국민이 이런 그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에 대해 김양은 어떻게 바라볼까.
"대한민국이 너무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저와 어머니, 어머니와 할머니의 의견이 다르듯이 '그들은 왜 저렇게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가' 고민하고 있어요. 평화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일구려면 세대 간 격차를 좁혀나가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김양은 "보수와 진보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자기 정책을 말하는 데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믿는다"며 "정치에 쉽게 참여하는 방법이 정당에 가입하는 거라 생각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정당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제=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시민마이크 이미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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