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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지용 촬영감독, 호롱불에 비친 이병헌의 얼굴

중앙일보

입력

‘남한산성’ 김지용 촬영감독 사진=라희찬(STUDIO 706)

‘남한산성’ 김지용 촬영감독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것처럼 시리다. 영화 ‘남한산성’(10월 3일 개봉, 황동혁 감독)은 보고만 있어도 약 400년 전 높은 산과 성첩의 혹독한 추위가 전해진다. 강은 얼어붙었고, 성벽은 찬 공기에 날을 세운 듯 했으며, 행궁 안에선 두 충신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이 입김을 내며 논쟁했다. 사실적이고 생생한 영상은 시대의 변화에 응답하지 못한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달콤한 인생’(2005, 김지운 감독) ‘밀정’(2016, 김지운 감독) 등 세련되고 감각적인 영상을 만들어온 김지용(41) 촬영감독의 역량에 새삼 감탄했다.

'남한산성' 김지용 촬영감독 #"영화라면 격조있게"

스물아홉 살에 ‘달콤한 인생’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 12년이 흘렀다. 그에게 ‘남한산성’을 찍던 다섯 달의 시간부터 촬영과 빛에 관한 원칙까지 속속들이 물었다. 한국 촬영감독으론 이례적으로 조명까지 관장하는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빛”이었다.

<'밀정'(2016) '성난 변호사'(2015) ‘상의원’(2014) ‘수상한 그녀’(2014) ‘라스트 스탠드’(201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인류멸망보고서’(2012) ‘도가니’(2011)‘인플루언스’(2010) ‘마린보이’(2009) '고고 70'(2008)‘헨젤과 그레텔’(2007) '미녀는 괴로워'(2006) ‘음란서생’(2006) ‘달콤한 인생’(2005)>


&#39;남한산성&#39;

&#39;남한산성&#39;

━황동혁 감독과는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4) 이후 세 번째 작업이다. 
“감독님이 트리트먼트를 쓸 때부터 작업 과정을 공유했다. 원작 소설을 빌려주며 읽어 보라 하더라.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면 어울리는 빛의 질감을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캄캄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이후 감독님과 중요하게 상의한 건 초반 세 장면이다. 인조가 행궁으로 떠나는 장면과 최명길이 청군과 마주한 장면, 김상헌이 언 강에서 사공(문창길)을 베는 장면. 현실적이며 건조하고 묵직한 영화임을 단번에 보여주려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리얼리티였다. 그래서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될 만한 요소를 많이 거둬 냈다. 뺄셈이 더 어렵더라.”

&#39;상의원&#39;

&#39;상의원&#39;

━앞서 작업한 ‘음란서생’(2006, 김대우 감독) ‘상의원’(2014, 이원석 감독)의 색감이 다채롭고 고왔던 것과 아주 다르다. 
“영화의 주제가 다르니까. ‘음란서생’은 당시 기존 사극보다 더 유려하게 찍고 싶었다. ‘상의원’은 옷이 중심이니 색의 균형을 잘 담아야 했고. ‘남한산성’은 거친 조명을 쓰는 동시에 옷과 피부의 결을 건조하고 춥게 보이도록 채경선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39;남한산성&#39;

&#39;남한산성&#39;

━‘남한산성’을 보고 나면, 호롱불로 콘트라스트를 준 주홍빛 화면과 저녁과 새벽녘을 담은 푸르스름한 화면이 떠오르는데. 
“조선의 밤을 ‘진짜’처럼 다뤄 보고 싶었다. 그땐 작은 방에서 촛불 하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을 테니까. 실제 초 몇 개를 켜 놓고 찍었다. 인공조명을 쓰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촛불에만 의지했다. 바깥 장면은 원래 밤으로 설정된 장면이 많았는데, 정말 밤이라면 아무것도 안 보일 테니 저녁과 새벽으로 바꿔 보자고 했다. 사실성을 담아낸 동시에 두 색이 대비돼 느낌도 좋더라.”

&#39;남한산성&#39;

&#39;남한산성&#39;

━행궁에서 벌어지는 설전 장면과 전투 장면의 대비도 흥미롭다. 
“행궁 장면은 촬영이 거든다는 마음으로, 배우가 연기하기 가장 편한 환경을 만들려 했다. 숏의 크기를 다양하게 찍지 않고 몰아서 찍기도 했다. 전투 장면은 좀 까다로웠다. 서날쇠(고수)가 중심인 첫 전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병사 300명이 죽는 북문 전투는 이 장면의 주인공이 없으니… 다큐멘터리 찍는 것 같기도 했고(웃음). 마지막에 줌 아웃해 사상자로 가득 찬 눈밭을 담아 ‘이 죽은 자들을 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그는 “카메라 워크나 프레임보다 빛을 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프레임의 크기는 시나리오의 내용을 담는 기술적 측면이 강한 반면, 빛은 영화 전체의 정서를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이는 그가 ‘도가니’부터 할리우드 시스템처럼 촬영과 조명을 모두 맡아 온 이유다.

&#39;달콤한 인생&#39; 제28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수상작이자 데뷔작. &#34;강렬한 누아르영화라 그에 맞는 세련된 영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감독님도 이런 마음을 잘 알아주셨다. 모든 게 처음이라 겁이 없었던 것 같다(웃음). 그만큼 다른 스태프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34;

&#39;달콤한 인생&#39; 제28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수상작이자 데뷔작. &#34;강렬한 누아르영화라 그에 맞는 세련된 영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감독님도 이런 마음을 잘 알아주셨다. 모든 게 처음이라 겁이 없었던 것 같다(웃음). 그만큼 다른 스태프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34;

━빛의 성질은 촬영과 조명을 배우지 않은 이에겐 쉬운 개념은 아니다.
“중요한 건 광원이다. 낮 장면이라면 대체로 태양광일 것이다. 햇빛도 촬영지의 위도, 위치, 계절과 시간에 따라 모두 미세하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직접 내리쬐는 빛인지, 반사된 산광(散光)인지에 따라 또 다르다. 그래서 자연광으로 찍는 장면이 쉽지 않다. 리허설 할 때와 실제 촬영할 때의 빛이 달라지니까. 지금 이 순간에 공기가 주는 느낌을 세심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밤 장면이라면 백열등·형광등·촛불 등 쓰는 조명마다 질감이 다르다. 예를 들면 거친 조명과 부드러운 조명은 그림자에서 차이가 난다. 전자가 그림자가 더 진하게 떨어진다.”

&#39;화이:괴물을 삼킨 아이&#39;. 장준환 감독과 함께한 첫 작품. 김윤석, 여진구, 조진웅 등 여러 배우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세심하게 담았다. &#34;&#39;남한산성&#39;을 찍으며 배우의 얼굴을 잘 담는 촬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잡은 앵글과 조명, 배우의 움직임이 딱 맞아 떨어질 때의 희열이 있다. &#39;화이&#39;는 처음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해준 작품이다.&#34;

&#39;화이:괴물을 삼킨 아이&#39;. 장준환 감독과 함께한 첫 작품. 김윤석, 여진구, 조진웅 등 여러 배우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세심하게 담았다. &#34;&#39;남한산성&#39;을 찍으며 배우의 얼굴을 잘 담는 촬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잡은 앵글과 조명, 배우의 움직임이 딱 맞아 떨어질 때의 희열이 있다. &#39;화이&#39;는 처음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해준 작품이다.&#34;

━영화마다 쓰는 조명 방식이 다른 것 같다.
“‘남한산성’처럼 콘트라스트가 주가 되는 영화도 있고 ‘상의원’처럼 색이 중요한 영화도 있다. 그래서 ‘상의원’은 빛을 감싸 주는 평평한 조명을 썼다. 그런데 빛이 다는 아니다. 이를 토대로 미술팀이 만든 색과 질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에서 구현하려는 빛의 양, 질감, 색을 맞추려면 협업과 의사소통이 정말 중요하다. 10년 정도 일하니 이게 다인 것 같다(웃음).”

━시나리오 독해력 등도 언어 능력도 촬영감독의 필수적 자질일까. 
“맞다. 일단 말이 통해야 하니까. 감독, 미술·의상 감독, 후반 작업팀 등 각자 구사하는 언어가 다르니, 더 많이 열어 놓고 많은 레퍼런스를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 오늘부터 공부한다고 될 건 아니고, 늘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쌓아야 한다.”

━데뷔 당시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유학파로 알려졌다. 처음부터 할리우드에서 시작할 생각은 없었나. 
“내가 유학 프리미엄을 누린 마지막 세대인 것 같다(웃음). 스무 살부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학을 했고, LA의 한 프로덕션에 일을 한 후 귀국했다. 할리우드는 경쟁이 더 치열한데 당시 난 아무것도 아니었고, 집에도 가고 싶었다. 막연히 한국에서 영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운 좋게 류성희 미술감독님을 통해 김지운 감독님을 소개 받았다.”

&#39;밀정&#39;. 일제 강점기 의열단과 조선인 일본 경찰의 독립 투쟁을 그린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콘셉트는 &#34;고전 스파이영화&#34;였다. 김 촬영감독은 &#34;당시 가장 많이 사용했을 백열등의 빛을 조명으로 선택했다&#34;고. &#34;처음 생각했던 차갑고 스산한 화면은 포기해야 했지만, 이 영화만의 독특한 느낌이 살아난 것 같다.&#34;

&#39;밀정&#39;. 일제 강점기 의열단과 조선인 일본 경찰의 독립 투쟁을 그린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콘셉트는 &#34;고전 스파이영화&#34;였다. 김 촬영감독은 &#34;당시 가장 많이 사용했을 백열등의 빛을 조명으로 선택했다&#34;고. &#34;처음 생각했던 차갑고 스산한 화면은 포기해야 했지만, 이 영화만의 독특한 느낌이 살아난 것 같다.&#34;

━12년 간 많은 현장을 오가며 스스로 달라진 점을 느끼나. 
“예전엔 색과 빛이 풍부하고 화려하게 쓰는 걸 선호했는데, 요즘은 간결한 게 좋다. 그래서 선택하는 영화도 달라졌다. 예전의 취향이라면 ‘남한산성’은 안 했겠지. 현장에선 예전보다 유해졌다는 얘기도 듣고(웃음).”

━영화 촬영 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있다면.
“조명 디자인과 미디어 아트를 좋아한다. 학교 다니던 시절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 작품을 좋아했다. 요즘 그의 신작을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 빛과 촬영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웃음).”

━요즘은 TV 드라마부터 웹드라마, 광고까지 영상이 넘쳐난다. 좋은 영화의 화면은 어떤 것일까. 
“이게 대답이 될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후반 작업 기술이 발달해서 촬영 후에도 표현할 영역이 아주 넓어졌다. 옵션이 너무 많아 길을 잃는 경우도 있다. ‘남한산성’ 후반 때도 멋지고 화려한 화면을 만들까 고민하다, 농담처럼 이런 말이 나왔다. ‘격조를 잃지 말자’고. 영화의 격조를 지키고 싶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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