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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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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과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과

지난날의 추억 중에 인상 깊었던 일, 충격적인 일 중의 어떤 것들은 나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그날의 모습이 사진처럼 생생히 찍혀 평생을 간다. 사람마다 이런 기억의 지형도는 달라 개인의 삶을 다르게 채색하지만, 공통된 장면이 하나 있다. 갓 태어난 아이와의 첫 만남 순간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생명체를 보며 우리는 예상치 못한 보호 본능을 체험하며 행복한 아이로 잘 키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보편적 무상 보육정책에 아이들 행복은 뒷전 #아이·부모가 함께 행복할 만한 대안 찾아야

개인주의가 넘쳐 나고 즐거움과 쾌락이 종교화하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시대, 아이 양육에 동반하는 희생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진다. 아이와의 인격적 연대와 사랑의 체험, 건강한 성장을 보며 배우는 무조건적 헌신의 가치 등은 퇴색해 가며 우리 사회는 급속히 저출산 사회로 진행한다. 저출산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면서 정부는 부모의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육정책을 쏟아 놓는다.

보편적 무상보육으로 요약되는 우리의 보육정책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비용을 정부가 모두 부담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을 경우 가정양육지원비 명목으로 현금이 지원되지만, 시설에 보낼 때의 지원금에 훨씬 못 미친다. 시간이 있더라도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내는 부모들은 자연히 늘어나고, 집에서 기르고자 생각했던 부모들조차 주변에 아이들이 없어 결국 보육시설로 아이를 보낸다.

정부의 보육정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가정 형편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균등하게 지원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저출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도 도마에 오른다. 엄청난 사교육비와 적자생존의 경쟁을 체험한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보육비가 지원된다고 너도나도 아이를 낳기 시작할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부모의 부담을 덜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 골몰하는 사이 정작 중요한 아이들의 행복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점이다.

보육(Educare)의 목표는 아이를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돌봄(Care)과 동시에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교육(Education)하는 것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에 따르면 생후 1년 사이에는 부모의 밀접한 보호 아래 안전함을 느끼며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느끼는 신뢰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후에는 신뢰를 바탕으로 지나친 통제 없이 세상을 탐색해 자율성을 얻어 나갈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일찍부터 부모와 아이의 분리를 조장하는 우리의 정책은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세상과의 신뢰를 쌓을 기회를 주지 못한다.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부모 역시 불안해지긴 마찬가지다. 때론 죄책감에 더 많은 간섭과 통제를 하고 아이를 과보호하게 된다. 이렇게 자율성도 위기를 맞는다.

“낳기만 하세요.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 얼마 전 흔히 마주치던 구호다. 지방자치단체는 이런저런 정책을 덧붙여 “낳기만 하면 우리가 책임진다”고 자랑스레 떠든다.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말인가? 부모들에게 짐이 되는 아이들을 맡아 주어 부모의 부담을 줄이는 일을 책임지겠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달콤한 유혹에 아이들이 부모와 분리되는 사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기회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 간다. 어른을 위한 나라만 있을 뿐 아이를 위한 나라가 없다. 이런 정책에 보육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낯 뜨겁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 국가 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안한 아이들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부모의 품에서 안전을 느끼며 아이가 자라고, 아이를 돌보며 아이와 더불어 부모가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하는 시간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부모의 짐을 덜어 주는 그런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육아휴직과 공동 육아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한 예가 될지 모르겠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