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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도 경제가 돌아갑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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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기억을 거슬렀다. 14년 전으로다. 2003년 5월 16일 노무현 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인 권기홍 장관이 경제단체 최고경영자를 상대로 조찬강연을 했다.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과 노동정책 방향’이 주제였다. 권 장관은 “기업이 잭나이프를 들고 노조와 싸우겠다는 식으로 나서면 (노조에) 생채기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패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은 폭탄선언으로 받아들였다. 파장이 커지자 권 장관은 인터뷰를 자청해 “손배소송과 가압류 등 잭나이프처럼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로 어떻게 대적하느냐는 뜻이었다”고 보충설명을 했다. 그랬다. 당시 몰아치는 파업에 기업은 속수무책이었다. 법적 무기라곤 장관이 인정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정부는 ‘정책 이념’이라는 포 사격으로 노조를 지원하는 형국이었다.

14년 전 ‘잭나이프’의 기억 연상시키는 친노 고용정책 #“경제 마인드로 노동정책 펴라”는 DJ 정부 충고 새겨야

권 장관은 “노동부 공무원은 경제부처 공무원이 아니다”고 했다. “노동부는 정부 내에서 노동자를 대변해야 하며 그것이 노동 편향이라면 편향하겠다”고도 말했다. 이런 정책 기조는 그의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두산중공업 분규 땐 장관이 직접 현장에 내려가 중재했다. 장관까지 나서 압박하는데 기업이 견딜 재간이 없다. 이후 노사분규는 봇물 터지듯 했다. 그때마다 “장관 나오라”는 요구가 빠지지 않았다. 노사 자율은 화려한 수사에 불과했다.

이걸 지켜보던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노동부 장관이던 방용석 전 장관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가 누군가. 그 이름 석 자와 그가 이끌던 원풍모방 노조를 빼고 한국 노동운동사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그가 술잔을 툭 털더니 내던지듯 한마디 뱉었다. “이러고도 경제가 돌아갑니까?”

그는 “DJ정부는 일자리 나누는 것을 근간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분배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노동계의) 기대감만 높아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제마인드를 가지고 노동정책을 봐야 한다. 노동운동 차원에서 노동자 시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 그런 시각이 노동정책의 오류를 가져온다”고 덧붙였다. “고용인력의 87%가 중소기업에 있다. 중소기업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노동정책을 해봐야 그건 공허한 메아리”라고도 했다.

옛 기억을 되살리고 보니 어쩌면 이렇게 지금과 닮았을까.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기조가 분배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도 흡사하다. 노조의 힘과 정부의 정책 이념이 어우러지며 기업은 시답잖은 무기를 아예 내려놨다. 혹여 노조가 민원이라도 제기하면 득달같이 근로감독이 들어오니 별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모든 노사분규에 즉각 답하는 건 아니다. 선별적이다. 안보위기 속에 장기화하는 방송사 파업에 대해선 합·불법 판단도, 조정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방 전 장관의 걱정과 충고를 대입하면 어떨까.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딱 들어맞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나마 권 전 장관은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반론을 제기하면 안 된다. 노조도 머리띠만 두르고 자신들의 값을 올려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데 지금은 이런 말을 했다간 적폐로 몰리기 십상이다. 노동개혁이나 생산성 향상은 금기 단어가 된 듯하다. 이러고도 경제가 돌아갈까. 아니나 다를까 현 정부가 출범한 뒤 반도체나 석유화학을 제외한 자동차·유통 등 대부분 기업이 아우성이다. 덩달아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회사를 떠난 실업자는 9월 현재 15.9%로 4년8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구조조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선 공신의 청구서를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경제 청구서가 소리·소문 없이 날아든 꼴이다.

지금 가장 답답한 사람은 누굴까. 어쩌면 현 장관으로부터 무능하다고 낙인찍힌 고용부 공무원일지도 모르겠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