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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를 음악·무용·패션·심리치료와 결합하면 무한 응용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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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프리랜서 장정필]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프리랜서 장정필]

"거만할 오(傲)에 놀 유(遊)예요. 정말 거만하게 놀자는 게 아니라 자존심 있게 할 소리는 하며 살자는 뜻입니다."
16일 오전 전북 전주시 금암동 전북대 인문대학 2호관 5층 중문과서예실습실. 이 대학 중어중문과 교수인 김병기(63)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이하 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은 전날 자신이 쓴 '오유(傲遊)'라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김병기 총감독 인터뷰 #전북대 중문과 교수, 21일 개막 공연 준비 #세계 최초로 서예와 음악·무용·영상 접목 #박영수 특검 등 명사 27명 작품도 볼거리 #김 총감독 "서예는 미술·음악·무용" 예찬 #"심리치료와 건강·장수에도 긍정적 효과" #"한자 모르고 인문학 연구는 어불성설" #"정부, 한문과 서예교육 부활해야" 주장

다양한 서체의 붓글씨가 쓰인 한지가 종(縱)과 횡(橫)으로 걸린 실습실은 김 총감독이 중문과 제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곳이자 본인의 작업실이다. 서예가인 김 총감독이 이끄는 전북비엔날레가 오는 21일부터 다음달 19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 전당과 전북예술회관 등에서 열린다.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초서체로 '화시일준(花時一樽) 설야천권(雪夜千券)'이라는 글귀를 쓰고 있다. '꽃 피는 시절에는 한 동이의 술, 눈 내리는 밤에는 천 권의 책'이란 뜻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초서체로 '화시일준(花時一樽) 설야천권(雪夜千券)'이라는 글귀를 쓰고 있다. '꽃 피는 시절에는 한 동이의 술, 눈 내리는 밤에는 천 권의 책'이란 뜻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올해 11회째를 맞은 전북비엔날레의 주제는 '순수와 응용'이다. 김 총감독은 "미술에도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 있듯이 과거에 사대부들이 종이와 붓·먹을 가지고 문자를 쓴 것이 '순수서예'라면 이런 전통적인 기법을 디자인과 인테리어·심리치료·도시미관 등 실생활에 활용한 것이 '응용서예'"라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행사는 순수예술로서 서예의 가치를 강조하되 이를 바탕으로 서예의 응용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고 범위를 넓히는 자리"라고 덧붙였다.

'붓의 춤, 먹의 울림'을 뜻하는 '필무묵향(筆舞墨響)'이란 주제의 개막 공연에서 김 총감독은 조선 후기 시인 이양연이 쓴 '야설(野雪)'이란 한시를 가로 2m, 세로 9m 크기의 한지 위에 붓으로 쓴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시작하는 이 시는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라는 내용이다.

김 총감독은 "서예를 무대에 올리는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라며 "대걸레 같은 붓을 이용해 하는 퍼포먼스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평면에서 붓의 움직임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무대에서 영상과 음악·무용·패션·기접놀이 등과 접목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서예는 단순히 '글씨 쓰기'가 아니라 미술이자 음악이자 무용"이라며 "필획의 움직임을 보면 음악처럼 율동감이 있고, 붓이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것은 무용과 같다"고 했다.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16일 이 대학 인문대학 2호관 5층 중문과서예실습실에서 본인이 붓으로 쓴 '광개안경(廣開眼境) 원망세변(遠望世變)'이라는 작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글씨체와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를 제 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며 "국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처럼 우리 눈의 시야를 넓혀서 멀리 세상의 변화를 살펴보자는 구절"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16일 이 대학 인문대학 2호관 5층 중문과서예실습실에서 본인이 붓으로 쓴 '광개안경(廣開眼境) 원망세변(遠望世變)'이라는 작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글씨체와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를 제 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며 "국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처럼 우리 눈의 시야를 넓혀서 멀리 세상의 변화를 살펴보자는 구절"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올해 전북비엔날레는 5개 부문 25개 행사에 세계 21개국, 1000여 명의 작가가 창작한 1300여 점의 서예 작품이 전시된다. 김 총감독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주목해야 할 공연으로 개막 공연과 함께 '서론(書論) 서예전'을 꼽았다. 왕희지(王羲之)와 구양순(歐陽詢) 등 중국의 대문장가가 써놓은 서예 이론 가운데 각국 작가들이 신조로 삼거나 감동을 받은 구절을 저마다 개성을 담아 작품으로 만든 전시다.

김 총감독도 '아서의조본무법(我書意造本無法)'이라는 중국 북송시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서론 일부를 예서체로 쓴 작품을 전시한다. '내 글씨는 본래 내 개성을 살려 쓰므로 구속받는 법이 없다'는 뜻을 가진 글귀다.

그는 '명사 서예전'도 추천했다.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과 정종섭·나경원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 27명이 작품을 내놨다. 박영수 특검이 행서체로 쓴 '시우(施雨)'라는 작품도 이중 하나다. '은혜의 비를 내리다'는 뜻으로 비가 와야 만물이 자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 총감독은 "두 자만 썼는데 앙증맞으면서도 격이 아주 높다. 글씨에서 선비의 기운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전북비엔날레는 1997년 2월 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문화 행사로 기획됐다. 서예비엔날레로는 세계 최초다. 첫 회 전북비엔날레가 성공하면서 2년마다 여는 행사로 정례화됐다. 전주가 비엔날레 장소로 선정된 배경에는 전북의 도청 소재지인 데다 창암(倉巖) 이삼만(1770~1845), 벽하(碧下) 조주승(1854~1903), 설송(雪松) 최규상(1891~1956), 석전(石田) 황욱(1898~1993), 강암(剛菴) 송성용(1913~1999) 등 내로라하는 명필(名筆)들이 활동했던 지역이어서다.

김 총감독은 전북비엔날레 초기엔 외부에서 자문과 작가 섭외 등을 돕다 2013년 9회 때부터 정식으로 총감독에 취임해 올해까지 3회째 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김병기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본인이 쓴 '오유(傲遊)'라는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정말 거만하게 놀자는 게 아니라 자존심 있게 할 소리는 하며 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병기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본인이 쓴 '오유(傲遊)'라는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정말 거만하게 놀자는 게 아니라 자존심 있게 할 소리는 하며 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그는 "1회 때 5000만원의 적은 예산으로 시작한 전북비엔날레가 20년을 이어오면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가 높은 종합적인 국제 서예 행사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전북비엔날레의 위상과 영향력도 커졌다. 그는 "유명 작가들이 개인전을 할 때 전북비엔날레에서 보고 간 작품들을 패러디하거나 이탈리아와 독일 등은 전북비엔날레를 다녀간 작가들이 서예협회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김 총감독은 "전북비엔날레는 한국 서예를 세계에 수출하려는 의지를 담은 행사"라며 "실질적으로 정통(正統)한 서예를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은 서예의 종주국이지만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서예의 정통을 스스로 파괴했고, 일본 서예는 일찍이 서양의 추상 미술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아 전통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며 "서양 사람들이 서예에 호기심을 가질 때 한국 서예가 중국과 일본보다 먼저 '세계 서예'로 거듭나게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 총감독은 "서예는 예술로서도 위대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 가치가 높다"며 '서예 예찬론'을 폈다. 응용 분야에는 서예를 이용한 심리 치료도 있다. 그가 밝힌 근거는 이렇다. 2005년 전북 익산초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학생 30명을 모아 한 학기 동안 서예를 가르쳤는데 전북대 심리학과의 도움을 받아 심리 검사를 한 결과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16일 이 대학 인문대학 2호관 5층 중문과서예실습실에서 붓을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01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16일 이 대학 인문대학 2호관 5층 중문과서예실습실에서 붓을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그는 "서예가 건강·장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붓을 잡게 되면 단전 호흡이 저절로 되고 좋은 구절을 쓰면서 명상하는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김 총감독에 따르면 대만에서 1949년부터 2000년대까지 활동한 유명 서예가 20명의 평균 수명 통계를 냈는데 101살이었다.

김 총감독의 바람과 달리 국내에서 서예는 소외되는 분위기다. 필기 용구의 변화와 컴퓨터의 등장으로 서예에 대한 관심이 낮아진 데다 한글 전용에 따른 한자 교육 폐지도 악영향을 미쳤다는 게 김 총감독의 분석이다.

그는 "베이징대 중문과의 경우 서예 전공 석·박사 과정에만 70여 명의 학생이 있을 정도로 중국은 서예를 연구 분야로 중시한다"며 "하지만 국내 대학은 중문과에서도 서예를 전공한 교수가 별로 없고 전국의 중문과 200여 개 가운데 서예 과목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된 대학은 전북대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중국이 부상하면서 한자와 서예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지난 16일 본인이 한지에 붓으로 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란 글귀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병기(63)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지난 16일 본인이 한지에 붓으로 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란 글귀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 총감독은 "이순신 장군을 최고 위인으로 알면서 그가 (한문으로) 쓴 '난중일기'를 국민들이 한 구절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부는 한문과 서예 교육을 부활해 정규 과목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면서 한문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책의 95% 이상이 한자로 기록됐는데 한자를 읽지 못하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건 영문학을 하면서 영어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김 총감독은 7세 때 처음 붓을 잡았다고 한다. 유재(裕齋) 송기면(1882∼1956) 선생 밑에서 공부한 김 총감독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붓글씨를 전수했다. 20대 초반에는 유재 선생의 아들이자 제자인 강암 송성용 선생 집에서 먹을 갈아주며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강암 선생은 송하진 전북지사의 부친이기도 하다.

전북 부안 출신인 김 교수는 전주교대 및 전주대 한문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만 중국문화대학(중국문학 전공)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1984년 7월부터 공주사범대학(중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9년 7월 전북대 중어중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한국 중국문화학회 회장인 그는 한국서예학회 회장과 베이징대(중문과) 해외초빙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지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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