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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보험 30개 가입한 일가족, 7억 챙겨도 단속 못하는 특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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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A씨 일가족 6명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데도 14개 보험사에 30여 개가 넘는 보장성 보험에 가입했다. 고액의 입원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보험 상품이다. 이 가족은 경미한 질병에도 입원이 쉬운 병·의원을 골라 함께 입원한 뒤 치료 등 명목으로 보험금을 청구했다. 이런 수법으로 이 가족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간 보험회사에서 챙긴 보험금만 약 7억5000만원에 이른다.

보험사기 적발 어려워진 까닭은 #처벌 세졌지만 심사 기준 애매모호 #심평원 입원 적정성 판정 필수인데 #회신 늦어지면 수사 착수도 지연돼 #‘범죄’ 확정돼도 환수 조항 따로없어 #보험금 찾으려면 민사 소송 거쳐야

해당 보험사는 이 가족을 보험 사기범으로 의심하고 지난해 7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의 발목을 잡은 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입원 적정성 심사다. 올 3월 경찰이 심평원에 이 가족의 입원이 적정한지에 대한 의료분석을 의뢰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경찰 수사관은 “지난해 요청받은 (입원 적정성 심사) 건수도 처리하지 못했다는 심평원의 답변이 왔다”며 “일단 시한부 기소중지의견으로 송치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말 ‘보험사기방지 특별법’이 도입됐지만 보험 사기는 여전하다. 당시 국회는 지능화·조직화·고액화하는 보험사기를 막기 위해 보험사기를 별도의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 규정을 강화했다. 특별법에는 기존 형법상 사기죄보다 보험사기 처벌을 강화(10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하는 조항과 미수범에 대한 처벌 및 상습범 가중처벌 조항 등이 들어갔다. 처벌을 강하게 하면 보험 사기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보험사기

보험사기

시행 1년을 맞았지만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 국회 정무위원회 김한표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보험 사기 피해금 환수율은 보험사기 적발액(3316억원)의 4.18%에 불과했다. 피해금 환수율은 2013년(5.66%) 이후 계속 낮아지고 있다.

처벌 강화에도 보험 사기가 줄지 않는 건 법에 빈틈이 많아서다. 특별법에 따르면 최근 보험 사기에서 가장 큰 비중(2016년 기준 전체의 70.9%)을 차지하는 허위(과다) 입원과 진단·상해의 경우 심평원에 입원 적정성 심사를 의뢰해야 한다.

입원 적정성 심사는 보험금을 청구한 질환이 실제 환자가 앓는 병과 일치하는지, 치료에 필요한 입원 기간은 적정한지, 실제 해당 환자가 입원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걸 말한다.

보험사고와 관련한 입원 적정성 심사는 심평원의 고유 업무가 아니다. 건강보험 심사에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정성 심사까지 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입원 적정성을 판단할 때 제공되는 자료가 진료기록부나 명세서 수준에 그친다. 보험 가입자가 실제 병을 앓아 입원했는지, 입원한 사람이 당사자가 맞는지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다. 대신 단순히 입원 기간의 적정성만 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A씨 가족의 사례처럼 심평원의 회신이 늦어져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해가는 ‘나이롱 환자’(멀쩡한 몸으로 장기간 입원해 보험금을 타내는 환자)를 걸러내지 못한다.

보험사 4곳에 10개 이상의 보장성 보험에 가입한 B씨도 이런 경우다. B씨는 2008년부터 4년간 요통 등을 이유로 12개 병원에 839일 입원했다. 해당 보험사는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 입원했다고 경찰에 수사 의뢰했지만 심평원은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입원 기간만으로는 입원이 적정했다고 판단했다. 무혐의 처분을 받은 B씨는 5억원의 보험금을 챙겼다.

김희경 생명보험협회 보험범죄방지팀장은 “입원 적정성 관련 심사 기준이 없기 때문에 허위 입원 환자를 솎아내기 어렵다”며 “보험사기방지특별법에 심사 관련 절차와 기준 조항 등을 명확히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보험 사기로 드러나도 이미 사기범에 지급한 보험금을 되찾기도 쉽지 않다. 보험금 환수 관련 조항이 특별법에 없어서다. 특별법 위반으로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지급한 보험금을 돌려받으려면 민사 소송을 거쳐야 한다.

계단에서 넘어진 경미한 사고로 2008년부터 5년간 병원을 옮기며 2500만원의 부당 보험금을 타낸 C씨의 경우 2013년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이후 형사 재판을 거쳐 보험사가 지난 9월 민사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아직도 보험금을 돌려 받지 못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기 적발인원은 8만3012명으로 전년보다 0.5% 줄었다. 적발금액은 7185억원으로 전년대비 9.7% 늘었다. 지난해말 현재 1인당 평균 보험 사기액도 870만원으로 2014년(710만원)에 비해 늘었다. 여전히 보험 사기가 횡행한다는 의미다.

보험사기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보험 가입자에게 돌아 간다. 선량한 보험 가입자가 보험 사기 손실을 메워주기 위해 비싼 보험료를 내기 때문이다.

실제 보험사기 등으로 인해 보험사의 손실률이 높아지며 올 들어 11개 손해보험사 실손보험료는 평균 19.5%, 14개 생명보험사의 실손보험료는 평균 7.2% 올랐다.

자유한국당 김한표 의원은 “보험 사기는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가입자 부담을 가중시키는 만큼 보험 사기 근절을 위해 조사권 강화, 범죄이익 환수 등 제도적 개선방안을 마련해 개정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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