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기업인 출국금지' 40여 년 만에 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기업이 부도가 나서 은행에 손실을 끼치면 기업인은 출국금지 당한다?

금융위, 은행업 감독규정 개정키로

지금까지는 그랬다. 금융위원회의 은행업 감독규정 제 83조에 따르면 부도, 파산, 정상가동 불능의 사유로 금융회사에 50억원 이상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인과 연대보증인은 은행이 6개월간의 출국금지를 정부에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이 내년 1월 31일부로 사라진다. 금융위원회는 13일 제 83조를 삭제하는 내용이 포함된 은행업 감독규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앞서 감사원이 “상위법에 근거가 없는 감독규정”이라고 지적한 점을 수용한 결과다.

‘부도 기업인 출국금지’제도의 역사는 꽤 오래다. 금융회사 연합 조직인 대한금융단은 1975년부터 출국금지를 시킬 ‘금융부실거래자’ 기업인의 명단을 일년에 두차례 정기적으로 발표했다. ‘기업은 망해도 개인(기업주)은 살 찐다’는 풍조를 없애겠다는 명목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은행감독원이 이 역할을 했다. 당시는 금융회사에 3억원 이상 손실을 초래한 기업인이 제재 대상이었고, 출국금지 기간도 무기한이었다. 사실상 처벌 내지 보복성 제재였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살아난다는 우리사회에 팽배한 사고방식을 근절시키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한다”는 게 당시 김만제 재무장관의 설명이었다(본지 1985년 7월 5일자).

이후 금융감독위원회가 1998년 출범하면서 해당 규정은 은행업 감독규정 제 83조로 들어왔다. 처음엔 출국금지 대상의 손실 규모가 10억원 이상‘이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대기업들이 여럿 쓰러지던 시기였다. 당시 금감위는 이 규정을 근거로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장수홍 청구그룹 회장 등 30대 그룹 총수들의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출국금지는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부도 기업인 출국금지 제도의 경우엔 형법상 수사 대상 여부와 상관없이 은행의 채권 회수라는 목적을 위해 출국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위원회는 감독규정 83조를 없애는 대신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에 관련 근거를 마련토록 법무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은행에 손실을 초래한 기업인이라도 횡령이나 사기로 형법을 위반했다면 이미 있는 규정으로로 출국금지가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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