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1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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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무송아!"

분명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마치 저 뒤쪽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무송은 흠칫 뒤를 돌아보려다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형님이십니까?"

무송은 차마 눈을 들어 무대의 혼령을 바라보지는 못하였다.

"나는 살아서도 흐리멍텅하게 살았지만 죽고 나서도 모든 것이 흐리멍텅한 채로 남아 있구나(生時懦弱 死後却無分明)."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죽음에 원통한 사연이 있는 것입니까? 저에게 말씀해보십시오."

무대의 혼령이 머뭇거리자 무송이 용기를 내어서 고개를 들어 혼령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혼령은 찬 기운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무송은 긴장이 풀리며 다시 돗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내가 꿈을 꾸었나, 헛것을 보았나. 내가 괜히 쳐다보려고 하는 바람에 내 기운이 형님의 혼령을 흩어지게 하고 말았구나.'

무송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웠다. 아무래도 무대의 죽음에 무슨 사연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영아가 정신이 나가지 않았어도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도 있으련만 아직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이 터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무송은 새벽놀이 하늘을 물들이자 상복을 입은 채로 사병 하나를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도 잘 눈에 띄지 않았는데 간혹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무송이 달려가 물어보았다.

"저를 아십니까? 청하현 포도대장 무송입니다. 먼 출장길에서 돌아오니 형님이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형님이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가슴병으로 죽었다던데."

"그것말고 다른 원인은 없었습니까?"

"글쎄, 무대랑 앞집 노파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 노파한테 가서 물어보지 그래요."

"그 할멈도 같은 소리만 합디다."

무송은 아침이 지나 대낮이 다 되도록 사람들을 붙들고 무대 죽음에 대하여 묻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한 사람이 무송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과일 중에서도 배를 주로 파는 운가라는 녀석이 있어요. 그 녀석이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이던데 그놈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무송이 시장을 이리저리 다니며 운가를 찾았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무송이 지쳐서 어디서 잠시 쉴까 하는데 저쪽 쌀가게에서 버들 바구니에 쌀을 담아 나오는 운가를 만났다.

"운가야 오랜만이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무송이 다가가자 운가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송 대장님, 돌아오셨군요. 근데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증인이 되어드릴 수 없다구요."

무송이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증인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수상쩍었다.

"운가야, 쌀을 사가지고 가는 걸 보니 오늘 과일은 다 팔았구나. 배도 고플 테니 어디 식당으로 가서 밥이나 먹자. 내가 사줄게."

"빨리 집으로 가서 아버님 밥을 해드려야 해요. 아버지는 병들고 예순이 넘으셔서 기동도 잘 못하셔요."

"운가는 참 효자구나. 잠시만 시간을 내면 되니 우리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무송은 운가를 간신히 달래어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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