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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창건 기념일보다 김정일 총비서 추대에 초점 맞춘 북...노동당 숙청사 살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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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우리 당은 역사의 온갖 도전과 광풍을 짓부시며 사회주의 위업을 승리에로(로) 이끄는 위대한 향도자”라고 주장했다. 창당 72년인 이날을 게재한 사설에서 신문은 “우리 당은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것이며 이 땅우(위)에 인민의 낙원, 인류의 이상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언급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날 예상됐던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도발이나, 중앙보고대회 등 당 창건 기념행사는 이날 밤까지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10일 오후 방송까지 북한이 관련 행사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다”며 “북한은 5주년이나 10주년 등 소위 꺾어지는 해에 행사를 성대히 하는데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이었던 지난 8일 행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것으로 대신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8일을 맞아 전원회의와 중앙보고대회(기념식)를 열고, 김정은과 주요 간부들도 이 때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다른 당국자는 “북한은 이목을 집중시킨 뒤 실제 행동에 나서지 않는 청개구리 전략을 구사할 때도 있다”며 “한미 정보 당국이 한국의 연휴기간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예의주시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군사적 옵션 사용에 부담을 느껴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습 도발의 효과를 위해 변죽만 울리다 말았거나, 집중 감시기간이 지나면 추가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추석 연휴기간 직전 최근 미사일 발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평양시 일대에서 미사일 발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트럭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고 한다.

당창건 72주년 행사 감감, 대신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 행사 대대적으로 진행 #45년 김일성 약한 세 감안 국내 공산단 틈새 노리면서 출발 #6ㆍ25전쟁, 당내 노선 갈등 통해 정적 하나 둘 제거 #연합체제 출발했지만 60년대 후반 김일성 단독 체제 완성 #김정일은 가족들간 투쟁, 김정은은 집권후 피의 숙청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당창건 72주년을 맞은 10일 중앙보고대회등 각종 행사대신 사설을 통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노동당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사진 노동신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당창건 72주년을 맞은 10일 중앙보고대회등 각종 행사대신 사설을 통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노동당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사진 노동신문][

보여주기 식 움직임을 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당창건 기념일을 맞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代) 세습을 정당화하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셈이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북한은 김일성이 일본과 투쟁을 거쳐 나라를 구한 뒤 조선(북한)을 세웠다는 점에서 그를 시조로 여기고 있고, 198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과 경제난 당시 김정일이 (북한을) 지켜냈다고 선전한다”며 “가부장 사회인 북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당을 어머니로 부르면서도 아버지 장군님(김정일), 어버이 수령(김일성) 등 최고지도자를 당 위의 존재로 여기고 있는 만큼 당 창건 기념일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8일)을 앞두고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를 열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인사를 했다.[사진 노동신문]

북한이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8일)을 앞두고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를 열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인사를 했다.[사진 노동신문]

이런 가운데 올해 창당 72년을 맞은 북한 노동당 역사는 ‘피의 역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처형한 것도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거세하면서 지도체제를 구축해온 김일성, 김정일의 연장이기도 하다.
실제 만주에서 활동하다 해방 한 달 여 뒤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은 옛 소련의 후원을 받으며 북한 지역에서 당권 장악에 주력했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세력이 약했던 김일성은 당시 박헌영이나 무정 등 국내파와 연안파가 주축이 됐던 국내 공산주의 세력 다툼의 틈새를 노렸다”며 “박헌영이 서울에 조선공산당을 세우자 김일성은 북한 지역의 당 간부들을 모아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열고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1국 1당 원칙에 따라 서울에 본부를 두고, 평양에는 분국을 설치하면서 세 장악에 나선 것으로 북한은 이날을 당 창건 기념일로 삼고 있다.

김일성 북한 주석(앞줄 오른쪽 둘째)이 소련 군정 및 북노당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일성 오른쪽이 허가이 내각 부수상, 왼쪽이 군정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 [중앙포토]

김일성 북한 주석(앞줄 오른쪽 둘째)이 소련 군정 및 북노당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일성 오른쪽이 허가이 내각 부수상, 왼쪽이 군정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 [중앙포토]

38선 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맡아 군정(軍政)을 실시하며 공산주의자들이 평양으로 모였고, 북한은 빨치산파(김일성), 국내파(박헌영), 연안파(김두봉), 소련파(허가이) 등의 연합체제로 운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6·25 전쟁 직후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파를 간첩혐의로 처형했다. 김일성의 정적 중 하나였던 허가이 역시 전쟁 직전 사망했다. 56년 8월 있었던 종파사건은 연합체제에서 김일성 단독체제로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8월 종파사건은 연안파였던 윤공흠 등이 주축이 돼 김일성을 몰아내려다 사전에 발각돼 김일성의 역공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대대적으로 숙청됐고, 김일성이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며 “67년에는 박금철·이효순 등 갑산파를, 69년에는 김창봉·허봉학 등 군부실세를 제거하며 1인 지배체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정적(政敵)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통해 체제를 구축한 반면, 김정일은 가족들과의 투쟁에서 이기면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미 구축된 김일성 체제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백두혈통’간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김일성이 “여맹위원장인 김성애(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 동무가 하는 얘기는 내 얘기와 같다”는 언급 이후 김성애의 치맛바람이 거세지자 오진우 등 빨치산 파들의 지원 속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과정에서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 등은 해외 대사로 나가 아직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또 삼촌이자 조직지도부장이었던 김영주 역시 75년 숙청했다. 80년 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표된 이후 탄탄대로가 열렸지만 90년대 후반 다시 피의 숙청이 벌어졌다.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으로 조성된 흉흉한 분위기 속에 쿠데타가 사전에 발각(6군단 사건)되고, 당과 경찰(당시 사회안전성)의 갈등을 틈타 대대적인 처형과 숙청이 이어진 심화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흉작의 원인을 물어 서관히 농업비서를 간첩혐의로 처형하기도 했다.

김정은은 친형인 김정철이 호르몬 계열의 건강이상으로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집권 이후 이영호 총참모장 등 군부 세력과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2013년 12월)했다. 지난 2월 13일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되며 내부 정적이 사라졌다. 김정은은 또 지난해 5월 7차 당대회와 지난 7일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아버지 세대의 핵심 간부들을 뒤로 물렸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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