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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각장애인들, 온몸으로 느끼는 역사·문화 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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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 지난 16일 전남 보성군 차밭을 찾은 시각장애인들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찻잎의 맛을 보고 있다. 홍권삼 기자

지난 16일 오후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대한다원 입구. 보성군청의 문화유산 해설사인 문성자(54.여)씨 주위에 32명의 관광객이 둘러서 귀를 기울였다.

"보성은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높아 녹차 재배의 최적지입니다." 문씨의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 중 선글라스를 끼고 있거나 알루미늄 지팡이를 든 10명은 시각장애인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자원봉사자다. 시각장애인들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조심조심 녹차 밭으로 올랐다.

일행인 이경재(50.대구대 점자도서관 근무)씨는 녹차 나무와 잎을 이리저리 만졌다. 이씨는 "녹차 나무 키가 생각보다 작다. 우리가 마시는 녹차가 이 나무에서 나온다니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이 대구에서 이곳까지 나들이에 나선 것은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의 '역사.문화 기행'프로그램 덕분이다. 자원봉사자와 시각장애인이 짝을 이뤄 유적지 등 문화 현장을 찾아가는 행사다. 보성 차밭 기행단은 이날 오전 8시 관광 버스에 올랐다. 곧바로 김정순(35.여) 역사.문화기행 팀장의 녹차 강의가 시작됐다. 시각장애인들은 김 팀장이 나눠 준 점자 안내문을 짚어가며 '공부'를 했다.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자는 휴게소와 식당 등 어느 곳에서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들을 화장실로 안내하고, 식사 때는 반찬까지 일일이 챙겨 줬다.

이들이 역사.문화 현장을 처음 찾은 것은 2003년 5월. 같은 해 2월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을 설립한 김현준(49) 원장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인 김 원장은 "장애인의 문화 욕구를 채워 줄 프로그램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 행사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열린다. 지금까지 21차례 열린 행사에 시각장애인 300여 명 등 모두 600여 명이 참가했다. 현장을 볼 수 없는 만큼 체험 방법도 가지가지다. 한옥이나 서원 등을 방문하면 마루나 기둥.문 창살 등을 손으로 만져보고 형체를 파악한다.

'탑이 있는 풍경'이란 주제로 지난해 3월 경북 의성군의 탑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는 문화원 측이 종이로 탑 모양을 만들어 만져보게 한 뒤 감상토록 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지팡이로 더듬어 파악하기도 한다. 녹차 밭 같은 곳에선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본다. '오감(五感)' 중 시각을 제외하고 촉각.후각.미각.청각 등 '사감(四感)'을 동원하는 식이다. 김 팀장은 "탑 유적지 방문 때는 일부 참가자가 지붕돌을 확인하기 위해 탑에 오르는 바람에 말리느라 혼났다"며 고개를 저었다.

빠짐없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는 김한숙(50.여.대구시 중구 삼덕동)씨는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고 문화와 예술에 눈뜨게 해 준 것이 이 프로그램"이라며 "앞으로 계속 참가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대구=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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