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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이중 잣대 "기관마다 제각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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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술에 취한 20대 미혼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지자체 5급 공무원은 직위가 해제된 상태에서 경찰 조사를 받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하기도 전에 파면됐다. 모텔에서 잠든 10대 소녀를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입건된 검찰 9급 공무원은 경찰이 '혐의가 인정된다'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지만 2주 넘게 원래 업무를 계속했다.

성범죄라도 기관따라 징계 절차 달라 #'솜방망이'이거나 과하게 몰아붙이거나 #국가공무원법상 직위해제는 선택 사항 #전문가 "기관장 엄벌 의지 및 원칙 중요" #'가해자=괴물'로 몰면 2차 희생양 낳아

해마다 공무원들의 성폭력 사건은 늘고 있지만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징계 절차는 기관마다 제각각이어서 '고무줄 잣대' 논란이 일고 있다. 비슷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당사자가 소속된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죗값이 달라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한밤중 모텔에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하려 한 전주지검 소속 운전직 9급 공무원 A씨(27)는 지난 7일 검찰로 송치됐다. 전임 검사장의 관용차를 몰던 A씨는 지난 7월 30일 새벽 친구 소개로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B양(18)을 전주시 덕진구 한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상 준강간미수)로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알몸 상태였던 A씨는 술 취해 잠든 B양의 속옷을 벗기려다 B양이 중간에 깨는 바람에 성폭행에는 실패했다. B양은 A씨가 성폭행을 시도하고도 되레 '모텔비를 내놓으라'고 하고 아무 사과 없이 떠나자 인근 지구대에 가서 A씨를 신고했다.

성폭력 이미지. [중앙포토]

성폭력 이미지. [중앙포토]

하지만 전주지검은 사건 발생 당일 A씨가 경찰 수사 대상자에 올랐다는 사실을 통보받고도 계속 운전 업무를 맡겼다. 검사장 관용차 대신 일반 업무 차량을 몰도록 보직만 변경했다. 전주지검 측은 대검 감찰 업무 매뉴얼에 따라 지난달 1일 A씨로부터 경위서를 제출받고 이튿날 광주고검과 대검에 비위 사실 발생 보고를 올렸지만 감찰에 착수하지 않았다.

전주지검은 한 달 넘게 감찰을 미루다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뒤에야 수사와 감찰을 병행하고 있다. 전주지검 관계자는 "피해자에 대한 추가 조사 결과 A씨의 혐의가 일부 인정돼 25일 직위해제 조치했다"며 "혐의가 확정되면 파면이나 해임 등 중징계하겠다"고 말했다.

전주지검이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를 저지른 직원에 대해 안이하게 대처하는 사이 해당 직원은 피해자와 그 가족을 수시로 찾아가 거짓 진술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B양 어머니는 "A씨가 '검찰에서 B양을 부르면 (사건 발생 당일) 모텔에서 자신(A씨)은 침대에 있지 않았다는 취지로 유리하게 진술해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전북도의 경우 전주지검과 달리 조치가 엄정했다. 전북도는 지난해 12월 전주시 서신동 한 모텔에서 술에 취한 여대생 C씨(23)를 성폭행한 혐의(준강간)로 입건된 전북도 인권팀장 전모(50)씨에 대해 경찰에서 범죄 사실을 통보한 직후 직위해제하고 대기발령 조치했다. 또 전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끝나기도 전인 지난 1월 인사위원회를 열어 중징계인 파면을 결정했다.

[일러스트=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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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지난 4월 모텔 폐쇄회로TV(CCTV)와 사건 발생 후 정황 등을 토대로 "성폭행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씨에게 무혐의 처분을 했다. 전씨는 전북도에 소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전북도 측은 "검찰 수사에서 혐의를 벗었더라도 전북도의 인권 업무를 총괄하던 유부남 간부가 딸뻘인 20대 여대생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면 사유로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박용준 전북도 감사관은 "공무원법상 직위해제는 의무가 아니어서 기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면서도 "전씨에 대해 선제적으로 징계 조치를 한 것은 인사권자인 송하진 전북지사가 성범죄를 심각하게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가공무원법 제73조 3항을 보면 직위해제는 선택 사항이다.
임용권자는 직무 수행 능력이 부족하거나 근무 성적이 극히 나쁜 자, 파면·해임·강등 또는 정직에 해당하는 징계 의결이 요구 중인 자, 형사 사건으로 기소된 자 등에게 직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일부 기관은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남성(교사)=가해자, 여성(학생)=피해자'라는 식의 고정관념에 얽매여 의혹을 받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방향으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학생 성추행 의혹을 받던 전북 부안의 한 중학교 수학교사 송모(54)씨는 전북도교육청의 감사를 앞둔 지난달 5일 김제시 백구면 자택 차고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송모 교사의 영정 사진. [사진 송 교사 유족]

숨진 송모 교사의 영정 사진. [사진 송 교사 유족]

전북교육청은 지난 4월 "송 교사가 여학생 7명을 성추행했다"는 학교 측의 신고를 받자마자 송 교사를 석 달간 직위해제 조치했다. 성추행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같은 달 송 교사에 대한 내사를 마무리했다. 당초 피해를 호소한 여학생들이 "성추행을 당한 일이 없다"고 진술을 번복하고 학부모들도 처벌을 원치 않아서다.

하지만 전북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는 조사를 계속했고 지난 7월 "송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한 신체 접촉 중에 성희롱으로 볼 만한 행동이 있었다"고 결정했다. 송 교사의 유족은 "교육청과 인권센터가 무리한 조사로 남편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공무원 비위에 대해 엄벌하는 분위기 속에서 행정기관마다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잣대가 들쑥날쑥하다 보니 전문가들은 "무죄추정의 원칙은 보장하되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만한 징계 절차 및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황지영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는 "법을 집행하는 행정기관이 사건이 발생해도 가해자에게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은 해당 기관이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낮거나 엄벌 의지가 약하다는 방증"이라며 "기관의 수장이 사실 관계는 엄격히 조사하고 거기에 걸맞게 징계를 한다는 원칙을 보여줘야 성범죄에 대한 그 기관 구성원들의 인식도 바뀐다"고 지적했다.
황 대표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남성과 가해자 중심으로 조사와 처벌이 이뤄져 온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며 "다만 성폭력 가해자가 뿔 달린 괴물이거나 우리와 다른 종류의 외계인으로 모는 것은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성매매와 성폭력·성희롱 등 성 비위를 저질러 징계를 받은 공무원은 586명이었다. 연도별 징계 인원은 2012년 64명, 2013년 81명, 2014년 74명, 2015년 177명, 지난해 190명으로 최근 3년 사이 3배 가까이 늘었다.
유형별로는 성폭력이 286건으로 가장 많았고, 성희롱은 219건, 성매매는 81건이었다. 소속 부처별 징계 인원은 교육부가 304명, 경찰청이 108명, 법무부가 26명,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5명 등이었다.

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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