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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족들은 깔끔했다, 1200년 전 수세식 화장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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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경북 경주 동궁과 월지 유적 인근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왕실의 수세식 화장실 모습. [사진 문화재청]

경북 경주 동궁과 월지 유적 인근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왕실의 수세식 화장실 모습. [사진 문화재청]

화강암을 타원형으로 다듬고 바닥에 구멍을 냈다. 그 위에 어른 키 크기의 납작한 돌을 깔아 발판으로 삼았다. 1200여 년 전 통일신라 왕실에서 사용했던 수세식 화장실 모습이다. ‘큰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엔 화장실 옆에 둔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변기 구멍에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수동식이다.

경주 동궁·월지 인근에서 발견 #변기·배수로 갖춘 국내 첫 ‘수세식’ #“고대의 화장실 중 가장 고급형” #구멍 난 화강암 위에 175㎝ 발판 #물 부어 오물 흘려보내 냄새도 막아

배설물을 실은 물은 경사진 도수로(導水路)를 따라 흘러내려 갔다. 그리고 지금의 정화조 비슷한 시설에 모인 것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대목도 있다. 수로 바닥과 상부에 전돌(쪼개어 만든 벽돌)과 기와를 깔았다. 오물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설계했다. 나름 청결을 고려했던 신라 왕실의 위생문화가 엿보인다.

변기와 연결된 수로. [사진 문화재청]

변기와 연결된 수로. [사진 문화재청]

8세기 무렵 만든 국내 첫 수세식 화장실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경주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옛 이름 안압지·사적 제18호) 인근에서 발견됐다. 변기·배수시설을 고루 갖춘 수세식 화장실이 한국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경주 동궁과 월지 북동쪽 인접 지역에서 발굴한 화장실 유물을 26일 공개했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태자가 생활한 별궁 터로 추정된다. 삼국 통일 직후 문무왕 14년(674)에 세운 동궁과 주요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이종훈 소장은 “현재까지 조사된 고대 화장실 중 가장 고급형”이라며 “통일신라 왕족의 화장실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현재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적인 전북 익산 왕궁리 구덩이. [사진 문화재청]

현재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적인 전북 익산 왕궁리 구덩이. [사진 문화재청]

신라 동궁 화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전체 넓이 24㎡의 건물 터에서 발견됐다. 변기는 2개의 방 가운데 한쪽에만 설치됐다. 양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있는 판석(板石·발판)과 그 밑으로 둥근 구멍이 뚫린 또 다른 돌이 조합된 형태다. 구조상 오물이 변기시설 아래 암거(暗渠·지하에 고랑을 파서 물을 빼는 시설)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박윤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요즘처럼 물을 유입하는 설비가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한 항아리 등에서 물을 떠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판석은 길이 175㎝, 너비 60㎝ 크기다. 변기 구멍이 있는 타원형 석조물은 길이 90㎝, 너비 56㎝, 그리고 가운데 구멍은 길이 13㎝, 너비 12㎝다. 2개의 판석과 타원형 석조물을 합한 전체 너비는 118㎝다.

변기에 남북 방향으로 연결된 암거(수로)시설은 너비 23㎝로, 땅 밑 13~56㎝ 깊이에 묻혀 있었다.

신라시대 화장실 유물 발견

신라시대 화장실 유물 발견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서 출토됐다. 왕궁리는 백제 30대 무왕(600~641) 때 조성된 궁성 유적이다. 2005년 직사각형 형태의 구덩이 3기와 종이 대신 뒤를 닦을 때 사용한 반원형 나무 막대가 발견됐다. 화장실에 쌓인 배설물이 일정량이 넘으면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길을 파놓았다. 구덩이 토양을 분석한 결과 회충·편충 등 기생충 알이 확인돼 화장실 유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따로 물을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주 불국사에서도 8세기 석제 변기시설만 발견된 적이 있다.

장은혜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이번 유구에서도 기생충 알 잔존 여부를 검사했지만 물에 다 씻겨 내려간 까닭인지 따로 발견되지 않았다”며 “도수로 남쪽 마지막 부분이 철길(동해남부선) 밑으로 연결돼 있어 유적 전체 모습은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궁과 월지 인근 유적은 2007년부터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지금까지 대형건물지·담장·배수로·우물·기와·벽돌·토기류가 다수 출토됐다.

박윤정 학예관은 “기존에 나온 기와·벽돌 등의 유물이 8세기 것이라 이번 화장실 유적도 8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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