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광선 난무하는 스타트업 축제, 경제를 살리다

‘TED와 버닝맨이 만났다.’  

매년 11월 30일~12월 1일 이틀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스타트업 축제 ‘슬러시(Slush)’를 지칭하는 말이다. TED는 미국에서 열리는 기술·엔터테인먼트·디자인을 주제로 한 지적인 강연회다. 이와 달리 버닝맨은 매년 여름 미국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에서 벌어지는 체험 행사다. 약 5만명의 참가자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광란의 축제를 즐긴다. 이 두 가지를 버무려놓은 게 슬러시란 뜻이다.

130개국 1만7500명 축제 된 슬러시 #2011년 노키아 충격 대학생들이 만들어 #록그룹 공연 같은 화려한 무대로 차별화 #스타트업 붐이 경제에 활기 불어넣어

TED 행사에서 연사가 강연하는 모습. [TED 홈페이지]

스타트업 컨퍼런스는 벤처기업과 투자자가 만나는 모임이다. 스타트업의 기술 소개와 투자 상담이 주를 이루는 의례적 행사가 대부분이다. 슬러시는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세 개의 무대엔 현란한 레이저광선이 난무한다. 예선을 거친 100개의 스타트업이 이틀간 배틀 형식으로 회사를 세일즈한다. 마지막 날 최후의 4개 스타트업이 랩 대결을 펼치듯 결승전을 벌인다. 지난해 결승전엔 한국 스타트업 스케치온과 샌드버드가 결승에 올라 각각 2위와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11년 300여명이 모이는데 그쳤던 슬러시가 지난해 세계 130개국에서 1만7500명이 참가한 세계적 스타트업 축제가 된 비결이다. 지난해 참가한 스타트업만 2336개였고 벤처투자회사도 1146곳이나 됐다. 전세계에서 온 610명의 기자가 취재경쟁을 벌였다.

행사 진행은 100% 자원봉사로 이뤄진다. 헬싱키 알토대학에 둥지를 튼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인 ‘스타트업사우나’가 주축이다. 오는 11월 30일 시작되는 올해 슬러시에선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슬러시 덕분에 정보기술(IT) 업계의 변방이었던 헬싱키는 스타트업의 메카로 떴다.

슬러시가 시작된 건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신종 플루가 기승을 부렸을 때 이곳은 소독약을 보관하던 창고였죠. 그때 학교서 빌린 출입문 열쇠를 아직 돌려주지 못했네요.”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학 캠퍼스 한쪽 귀퉁이 자리잡은 스타트업사우나. 지난해 초 5대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캐롤리나 밀러(27)의 설명이었다. 스타트업사우나는 대학생 창업동아리가 만든 유럽 최대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다. 2010년 출범 후 7년 동안 4500건 이상의 신청을 받아 222개의 스타트업을 길러냈고 2억유로(약27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귀국한 학생들이 의기투합해 학교로부터 창고를 빌려 만든 창업동아리가 유럽에서 가장 큰 ‘알토에스(Aaltoes)’였다. 학교가 지원해준 건 창고 건물뿐이었다. 알토에스는 2010년 스타트업사우나를 출범시키고 2011년엔 스타트업 축제 슬러시를 열었다. 2010년 핀란드 정부가 헬싱키 공대·정경대·예술대로 나뉘어져 있던 학교를 알토대학으로 통합한 것도 경계를 뛰어넘는 스타트업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핀란드 헬싱키의 알토대학 캠퍼스 한 귀퉁이 자리잡은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스타트업사우나. 대학생 창업동아리가 만든 유럽 최대 엑셀러레이터다. [사진 정경민 기자]

시정부도 발벗고 나섰다. 2014년 130년 된 헬싱키 최초의 공립 마리아병원이 이전을 하자 건물을 새 단장해 ‘마리아 0-1’이란 스타트업 하우스로 만들었다. 임대료는 한 달에 1인당 50유로(약6만원). 전체 9600㎡(약 2900평) 건물엔 100개의 스타트업이 입주해있다. 입주회사 선정과 운영도 시정부가 아니라 ‘스타트업사티오’란 비영리재단이 맡고 있다.

정부는 자금과 기술을 지원했다. 핀란드는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은 뒤인 83년 고용경제부 산하에 ‘테케스(Tekes)’란 기술지원센터를 설립했다. 핀란드 기업의 연구 및 기술 개발을 돕는다. 2015년에만 5억7500만유로를 지원했다. 테케스의 미카 클레메티넨 프로그램 매니저는 “모바일 게임 클래시오브클랜을 만든 수퍼셀도 테케스가 키워낸 벤처기업”이라며 “수퍼셀은 5년 만에 20억 유로의 매출을 올렸다”고 소개했다.

주한핀란드 무역대표부 최형욱 상무관은 “핀란드는 인구가 550만명 밖에 안 돼 일찍부터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며 “범부처가 참여하는 ‘팀 핀란드(Team Finland)’란 조직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데는 관할을 따지지 않고 관련 부처가 공조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핀란드 경제는 노키아 쇼크 직후인 2012년부터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그러나 스타트업 붐이 일면서 지난해부터 경제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테케스의 유카 헤이리넨 이사는 “10년 전만 해도 장래 희망을 물으면 십중팔구 노키아 취직을 꼽았던 젊은이들이 이젠 스트타업 창업을 으뜸으로 꼽는다”며 “핀란드 경제의 앞날은 밝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사우나와 슬러시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다

세계적 스타트업 축제가 된 슬러시를 이끌고 있는 두 20대. 왼쪽부터 스타트업사우나 최고경영자(CEO) 캐롤리나 밀러(27)와 슬러시 CEO 마리안네 비쿨라(25). 스타트업사우나에는 사우나 모양의 회의실이있다. 이곳에서 결론을 낼 때까지 끝장 토론을 한다. [사진 정경민 기자]

지난 6일 알토대학 캠퍼스에서 슬러시 준비에 한창인 스타트업사우나 최고경영자(CEO) 캐롤리나 밀러(27)와 슬러시 CEO 마리안네 비쿨라(25)를 만났다.

슬러시는 어떻게 시작됐나.

게임 브랜드 앵그리버드를 만든 로비오의 창업자 중 한 명인 피터 베스터바카가 2008년 동료 4명과 헬싱키의 젊은 창업자 모임을 만든 게 발단이 됐다. 2010년 피터가 로비오를 설립하면서 당시 알토대학의 창업 동아리에 행사를 넘겨주고 멘토를 했다.

슬러시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

핀란드의 초겨울엔 얼음이 밤에 살짝 얼었다 낮엔 녹는 슬러시 상태가 된다. 이 계절에 하는 행사라 슬러시란 이름을 붙였다. 미국과 유럽의 스타트업 행사는 대부분 11월 전에 마무리되고 곧이어 크리스마스 연휴가 된다. 슬러시는 그 사이 짧은 공백기간을 파고들었다. 슬러시에 세계 각국 스타트업과 벤처투자자가 몰리는 것도 미국이나 유럽에 별다른 행사가 없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니치 마켓을 공략한 셈이다. 슬러시 창설자들이 이 계절을 택했던 것도 별다른 행사가 없어 장소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슬러시가 단기간에 세계적 스타트업 축제가 된 비결은.

헬싱키는 IT업계의 변방이었다. 세계적인 벤처투자가는 죄다 미국 실리콘밸리나 런던·베를리만 쳐다봤다. 그래서 남과 달라야 했다. 스타트업 창업가나 강연자가 마치 팝가수처럼 화려한 무대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도록 한 게 젊은이들의 감성에 맞은 것 같다. 때마침 핀란드에 스타트업 창업 붐이 일면서 실력 있는 벤처가 많아진 것도 외국 벤처투자자의 관심을 끌었다.

행사 진행을 철저히 비영리로 하는데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할 건가.

물론이다. 행사비 대부분은 참가자가 내는 입장료 수입으로 충당한다. 지난해 입장료 수입은 300만유로에 달했다. 외부 기업이 후원은 할 수 있지만 행사에는 관여하지 못한다. 슬러시는 앞으로도 비영리 행사로 치러질 거다.

해가 갈수록 행사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규모를 더 키우는 것보다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세계적인 벤처투자자를 많이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슬러시가 헬싱키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온 스타트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판이 되길 바란다.

상하이·도쿄·싱가포르에서도 슬러시가 열렸는데 서울에선 계획 없나.

얼마 전 중동의 한 도시로부터 거액의 지원 제안이 왔으나 정작 스타트업의 참여 열의는 부족해서 정중히 거절했다. 슬러시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뤄지는 풀뿌리 축제다. 그런 열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 비영리 행사이므로 브랜드 사용료 같은 건 없다.

스타트업사우나와 슬러시의 관계는.

스타트업사우나에서 코치한 스타트업의 마지막 데뷔무대가 슬러시다. 스타트업사우나까지 창업지망생이 참여할 수 있는 코스는 5가지다. 첫 코스가 알토에스(Altoes)다. 스타트업의 초등학교라고 보면 된다. 두 번째는 정션(Junction)이다. 48시간 토론회에 참가해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코스다. 세 번째가 스타트업라이퍼스(Startuplifers)다. 이 코스에선 팀마다 코치가 붙는다. 미국 실리콘밸리나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의 벤처기업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네 번째 코스가 팀업(TeamUp)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팀을 짜고 실행 가능한 사업계획을 만든다. 마지막이 스타트업사우나다. 7주간 집중 육성프로그램을 거친다. 스타트업사우나를 통과한 스타트업은 슬러시에 무료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샌프란시스코에 실리콘 밸리가 있다면 헬싱키엔 실리콘 발릴라가 있다.’ 

핀란드 헬싱키의 제너럴일렉트릭(GE) 연구개발센터 옆에 마련된 GE 이노베이션 빌리지 전경. 현재 40여개 스타트업이 입주해 GE 기술진과 협업을 하고 있다. [GE 이노베이션 빌리지]

발릴라는 헬싱키 중심부의 고풍스런 지역이다. 400여개 달하는 핀란드의 헬스케어 관련 기업과 연구소가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 제네럴일렉트릭(GE)을 비롯해 필립스, 바이엘 등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이 헬싱키에 R&D센터를 설립한 건 이 때문이다.

GE는 2014년 6월 R&D센터를 지으면서 현지 헬스케어 벤처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실험장인 ‘헬스 이노베이션 빌리지’를 함께 열었다.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인 GE와 헬싱키의 작은 벤처기업이 한 지붕 밑에서 일하는 공간이다.

빌리지 안에 들어서면 칸막이가 없는 책상이 펼쳐진다. 책상머리엔 기업 로고가 드문드문 붙어 있다. 미코 카우피넨 촌장은 “사설 인큐베이터에선 책상 하나 임대하는데 월 400~500유로를 내야 하지만 이곳에선 월 100유로만 내면 된다”며 “형편에 따라 1개만 빌릴 수도 한 블럭을 다 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책상을 임대하면 회의실이나 프린터는 무료로 쓸 수 있다. 현재 40여개 기업 200여명이 일하고 있다. 빌리지는 일종의 인큐베이터지만 GE는 입주기업에 지분투자는 하지 않는다.

GE 이노베이션 빌리지에는 칸막이가 없는 책상이 펼쳐져 있다. 각 책상은 스타트업이 임대한 자리다. 월 100유로만 내면 회의실과 프린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칸막이가 없는 만큼 입주기업들은 프로젝트 별로 이합집산하며 자유롭게 정보도 주고받고 사업도 같이 한다. 건물 지하 직원식당에 마련된 ‘워리어 커피숍’에선 커피가 공짜다. 빌리지의 벤처기업은 물론이고 옆 건물의 GE R&D센터 기술자와 개발자가 식사 때마다 자유롭게 어울리게 하기 위한 GE의 배려다.

원격 재활치료기기를 만들고 있는 굿라이프 헨릭 유르겐스 최고경영자(CEO)는 “우리 같은 작은 벤처기업이 GE R&D센터의 기술진과 개발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느냐”며 “GE의 고객이나 납품업체 직원을 소개받는 것도 큰 혜택”이라고 말했다.

인용구인터뷰부제 컴포넌트입주기업 중엔 의료장비를 생산하는 곳도 적지 않다. 이들을 위해 GE는 각종 테스트 및 제작 장비를 교체할 때마다 구모델을 빌리지에 기증해왔다. 뇌에 저주파를 쏴 우울증이나 치매를 치료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수마(Sooma)의 투오마스 노이보넨 CEO는 “우리 직원은 5명밖에 안 되지만 GE 테스트 장비 덕에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며 “한국에도 판매망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뇌에 저주파를 쏴 우울증이나 치매를 치료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수마(Sooma)의 투오마스 노이보넨 CEO. [사진 정경민 기자]

암 수술 후 생기는 부종을 치료하는 의료기구를 만드는 HLD의 칼레 파로마키 CEO는 “지난해 GE헬스케어 최고 책임자가 빌리지를 방문해 입주기업마다 경영 조언을 해줬다”며 “벤처기업이 취약한 마케팅·법무·세무·대관 업무 등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암 수술 후 생기는 부종을 치료하는 의료기구를 만드는 HLD의 칼레 파로마키 CEO. [사진 정경민 기자]

GE는 빌리지 성공경험을 살려 에너지 분야로 빌리지를 확장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다. 카우피넨 촌장은 “처음엔 GE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줬지만 입주기업이 늘고 다양한 협업이 이뤄지면서 이젠 입주기업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일하는 방식이 거꾸로 GE를 변화시키고 있다”며 “글로벌 기업과 작은 벤처기업도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새로운 협업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했다.

핀란드 헬싱키=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