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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동지의 정치 극복하려면 ‘관광객’ 같은 태도 필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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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08면

[김환영의 지식 톡톡톡] ‘오타쿠論’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

신간이 출시될 때마다 주목받는 아즈마 히로키는 자크 데리다(1930~2004) 전문가다. 사회현상을 해체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오종택 기자

신간이 출시될 때마다 주목받는 아즈마 히로키는 자크 데리다(1930~2004) 전문가다. 사회현상을 해체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오종택 기자

세계적인 사상가들은 가끔 가다 ‘황당한’ 주장을 한다. ‘문명 충돌이 국제 질서를 위협하는 첫째 요소가 된다’ ‘역사는 끝났다’와 같은 주장 말이다. 그들의 책을 읽어 보면 뭔가 속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일리 있는 거짓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얼떨결에 무릎을 치고 있는 우리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다.

탈정치가 특징인 오타쿠 집결시켜 #정치적 공공성 어떻게 세울까 연구 #한·일 서로 너무 이해하려고 노력 #모른다는 것 받아들이는 태도 중요 #기억이 정치의 중심에 놓인 한국 #일본과 매우 달라서 놀라

일본 사상계의 한 축을 대표하는 비평가·소설가인 아즈마 히로키(東浩紀·46)도 그런 경우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게임에 열광적으로 집착하는 오타쿠에게서 탈정치화·탈근대를 끄집어낸다. ‘관광객’ 같은 태도가 정치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법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일반의지 2.0:루소·프로이트·구글』 등 그의 저작 대부분이 우리말로 번역됐다. 한국 마니아층이 은근히 두껍다. 아즈마가 광주비엔날레 월례 토크에서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와 공동 발제를 위해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도쿄대 학부와 박사 과정에서 과학사·과학철학·문화를 전공한 그는 와세다대 교수 등을 거친 뒤 겐론(ゲンロン)이라는 회사를 창립해 대표 겸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4일 그를 만났다. 인터뷰 통·번역은 곤노 유키(紺野優希·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 과정)가 맡아 줬다.

한국에도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그들은 당신 저작의 어떤 점을 좋아할까.
“나 또한 알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은 문화평론에서 정치사상까지 다양해 그만큼 일본 독자층도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여러 유형의 독자층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
그렇다면 일본 독자층은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크게 보면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오타쿠 문화를 분석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일문판 2001, 한글판 2007)의 독자와 『일반의지 2.0』(2011, 2012)의 독자다. 이 두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겐론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잡지를 출판하고 있다. 겐론 활동으로 독자층끼리 점차 소통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오타쿠 문화 분석에 나선 이유는 뭔가.
“오타쿠에 오늘날의 세계, 포스트모던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봤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고 오타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타쿠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직결된 문제다.”  
그렇다면 오타쿠 현상의 가장 큰 특징, 핵심은 뭔가.
“탈정치화(de-politicization)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비(非)오타쿠 젊은이들은 어떤가. 그들 역시 탈정치화됐는가. 아니면 정치화·탈정치화가 아닌 제3의 개념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치에 관심 있는 젊은이’와 오타쿠 젊은이는 전혀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일본 젊은이도 본질적으로는 오타쿠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정치 참여 자체가 ‘오타쿠적인 것’으로 된 상태다. 정치 참여가 ‘정치라는 게임을 소비하는 것’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타파할 것인지가 일본 지식층에 주어진 거대한 과제다. 그래서 나는 비정치적인, 탈정치화된 사람들을 집결시켜 어떻게 정치적인 공공성을 세워 나갈 수 있을지를 하나의 과제로 인식하고 연구하고 있다.”  
오타쿠 하면 우선 남성이 떠오른다. 오타쿠의 개념을 젠더(gender)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일본에서 여성 오타쿠 수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오타쿠는 남성의 탈정치화·탈국가화를 내포한다. 그래서 오타쿠화라는 것은 애초부터 여성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오타쿠라는 개념이 제기하는 젠더의 문제는 매우 복잡해 답변하기 쉽지 않지만 ‘오타쿠=남자’라는 고정관념이 수습할 수 없는 현상이 여럿 있다. 일본에서 오타쿠 남자 자체가 애초부터 주류가 아닌 소수 입장에 서 있다. 어쨌든 오타쿠의 젠더는 참 복잡한 문제다.”  
근대성(modernity)과 탈근대성(post-modernity)은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에 대해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한다. 내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주장한 바는 근대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시대’, 탈근대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매우 느슨해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전후 일본은 패전의 영향으로 국가의 존재가 극단적으로 축소되고 탈근대화가 용이하게 이뤄졌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당신은 장자크 루소(1712~78)의 일반의지를 발전시켜 빅데이터 시대가 가능케 하는 ‘일반의지 2.0’을 제시했다.
“루소는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비정치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루소는 그러한 인간들이 어떻게 정치를 탄생시키는지 고민했다. 이 모순이야말로 루소가 주목한 민주주의의 토대다. 우리는 이 토대를 모르고 생활한다. 우리는 도덕과 윤리로 정치를 실현시키려 한다. 이 방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정치적 인간이라는 현실 위에 정치·사회·공공성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 관심사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에 나는 오타쿠를 주목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정치적이면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인간에게 정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인가. 일종의 중용이 필요한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나는 중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내가 최근에 일본에서 『관광객의 철학(觀光客の哲学)』(2017)을 출간했다.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관광객’이란 말을 쓴 이유가 있다. 관광객은 어떤 곳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소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상당히 ‘무책임’하면서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이 관광객 같은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정치를 보면 배타적인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동지와 적의 관계’가 여러 곳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런 상황에서 관광객으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강조한 게 ‘관광객 철학’이다. 중용과도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새로운 개념을 많이 창안한다. 개념은 어떻게 만드는가. 예컨대 생각이나 독서나 명상을 통해서인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 새 개념이 나온다. 특히 나와는 생활환경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다. 예컨대 지금 당신과 인터뷰하는 상황도 포함된다.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되도록 추상화하고 단순화해 설명하고자 신경 쓴다. 바로 그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서양 철학 전통에서는 ‘관조하는 삶(contemplative life)’이 인생의 목표·행복으로 중시된다. 당신은 어떤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연’이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성공과 실패는 능력뿐만 아니라 운이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된다. 행복을 바란다면 우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중요하다. 상상력도 중요하다. 인간은 ‘내가 만약에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을 생각하는 유일한 생명체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며,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인생, 다른 역사도 가능했다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일 관계에는 독도·위안부 등 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있다. 갈등이 새로운 기회와 이익을 가로막고 있다. 양국 관계가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국이 더 친해지고 보다 많이 교류하기를 바란다. 다만 친해지는 것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해도 친해지는 경우가 있다. 친한 친구 사이라도 친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양국 간 필요한 것은 그러한 관계가 아닐까 싶다. 양국은 서로를 너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상호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우호 관계의 기초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이번에 며칠 동안 광주와 제주도에 머물며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기억과 정치’의 관계가 양국에서 매우 다르다는 점에 놀랐다. 한국은 기억이 항상 정치의 중심에 놓였다. 기억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어느 쪽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이처럼 차이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 책을 읽고 있는 한국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정말 기쁘다. 그런데 한국 독자들은 일본 독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차이점을 알고 싶다. 계속 서로 접근해 가다 보면 양국 간에 진정한 우호 관계가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환영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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