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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의 정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물건의 정신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 피카, 스칸폼은 문구, 커피 디저트, 식품, 가구, 카펫, 장난감 등 북유럽의 결이 묻어나는 다양한 아이템을 만날 수 있는 숍이다. 이 숍들을 경영하는 박종덕 대표는 당연하게도 물건을 무척 좋아한다. 사무실과 집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장품을 위한 별도의 창고가 있을 정도로 종류도 양도 엄청나다. 종일 그의 엄청난 셀렉션의 일부를 구경하며 물건에 담긴 문화에 대해 생각하였다.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 피카, 스칸폼 매장의 주조를 이루는 파랑은 그가 좋아하는 컬러다. 그래서 파랑색 물건은 웬만하면 산다. 심지어 실까지도!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 피카, 스칸폼 매장의 주조를 이루는 파랑은 그가 좋아하는 컬러다. 그래서 파랑색 물건은 웬만하면 산다. 심지어 실까지도!

2006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초입에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라는 산뜻한 숍이 생겼다. 화려한 컬러의 박스와 앨범, 카드, 포장지, 연필, 지우개 등을 파는 문구점인데, 마치 선물 가게처럼 알록달록했다. 물건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들었다.

스웨덴 출장길에 우연히 박스를 파는 작은 가게에 크게 감동한 마케터는 “이거 망한다, 문방구가 되겠느냐”는 둥의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럼 강남역이나 로데오거리에 차려라”는 조언도 뒤로하고 당시 갤러리와 서점과 디자이너들의 부티크가 자리해 운치 있으나 인적은 드문 가로수길에 덜컥 문방구를 열었다.

외국계 회사의 마케팅 이사로 승승장구하던 남자는 그렇게 북유럽 문방구 주인이 되었다. 3년 뒤에는 스웨덴의 커피와 음료, 디저트를 파는 피카(FIKA)라는 카페를 열었다. 스웨덴 원두로 만든 커피와 스웨덴 사람들이 먹는 디저트, 달라호스라는 스웨덴 말 오브제 등 신기한 볼거리가 많았다. 피카는 스웨덴 말로 커피 브레이크, 소중한 사람들과의 커피 타임이라는 뜻이다. 당시 우리에겐 없던 개념이었다.

2012년에는 북유럽 라이프스타일 편집 숍 스칸폼을, 작년에는 타스크 북샵이라는 서점을 열었으며, 북유럽 문화를 알리는 문화원 스칸디나비안 인스티튜트도 열었다. 이제 그는 북유럽의 예쁜 물건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북유럽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지만, 대부분 북유럽 디자인의 겉모습만 즐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비슷하게 만든 카피 제품도 나오고 사람들은 그걸 또 사죠.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물건이 지닌 진정성, 가치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더군요.” 물건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점점 진지해졌다. 그는 지난 1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다. 그 시간을 통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서로의 문화가 섞이고 나름의 색깔로 숙성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스웨덴과는 상반된 디자인 정체성을 지녔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북유럽을 동경하고, 북유럽은 또 이탈리아의 어떤 것을 동경하며 모방하고 영향을 받고 나름의 색으로 진화한다. 이는 19~2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당시 프랑스 파리로 모여든 예술가들이 파리 무드를 작품에 표현해내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저마다의 역사와 환경이 섞이고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서 문화가 되었다.

1 일본에서 산 나무 상자. 정성스럽게 마감해 완성도가 높다. 2 피카에서 판매하는 종이 식탁 매트. 수저받침은 도자기 작가의 작품. 3 치약은 수입이 까다로워 나라마다 로컬 제품이 있다. 그 다양함을 보는 재미에 하나둘 소장품이 늘었다. 4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의 상자. 북유럽 사람들처럼 그도 거실 수납함으로 쓴다. 장식장 위의 컬러 블록은 젠가.

1 일본에서 산 나무 상자. 정성스럽게 마감해 완성도가 높다. 2 피카에서 판매하는 종이 식탁 매트. 수저받침은 도자기 작가의 작품. 3 치약은 수입이 까다로워 나라마다 로컬 제품이 있다. 그 다양함을 보는 재미에 하나둘 소장품이 늘었다. 4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의 상자. 북유럽 사람들처럼 그도 거실 수납함으로 쓴다. 장식장 위의 컬러 블록은 젠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발전을 이룬 배경 때문인지 북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느긋한 진화가 아닌 급함을 보인다. 그는 북유럽의 겉모습이 아니라 문화의 중심을 알고 즐기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문화도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요즘 그가 북유럽의 멋진 물건을 소개하는 것보다 경험, 문화의 공유에 열정을 다하는 것도 그런 안타까움에서다.

그의 공간에는 팝업 북, 색실, 크리스마스 틴 케이스, 양초, 빈티지 안경, 젠가, 미니카, 빨래집게, 밀폐용기, 치약…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그간 숍을 통해 선보였던 모든 물건까지 있어 마치 북유럽 물건 박물관 같았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사 왔다는 빨래집게의 컬러와 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5 자동차의 컵홀더를 나비의 날갯짓처럼 표현했다. 6 그가 10년 전 대단한 충격과 영감을 받은 사브의 브랜드 북. 7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장과 대학 시절의 배낭여행 기차표, 리플릿, 심지어 ‘오른쪽으로 돌아 5분’이라고 적은 노란 포스트잇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물건들을 보며 옛날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그의 말대로 물건은 추억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다. 8 노르딕 니트를 입은 소년 형상의 양초. 모자와 셔츠의 뜨개실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5 자동차의 컵홀더를 나비의 날갯짓처럼 표현했다. 6 그가 10년 전 대단한 충격과 영감을 받은 사브의 브랜드 북. 7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장과 대학 시절의 배낭여행 기차표, 리플릿, 심지어 ‘오른쪽으로 돌아 5분’이라고 적은 노란 포스트잇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물건들을 보며 옛날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그의 말대로 물건은 추억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다. 8 노르딕 니트를 입은 소년 형상의 양초. 모자와 셔츠의 뜨개실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생산 현장은 무척 초라한 시골 공장인데 여기서 만드는 사소한 플라스틱 집게 하나조차 가장자리에 거스러미 하나 없이 완성도가 높단다. 올록볼록 입체감과 소녀가 입은 니트 옷의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살려 만든 크리스마스 쿠키 상자와 크리스마스 양초를 보여주면서는 “크리스마스인데 이 정도 물건은 써야 하지 않나요?”라고 되묻는다. 그러니 이런 물건을 보면 쿠키 먹을 일이 없어도 손에 넣는다.

새 물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랍 속에는 무려 30년도 넘은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 펜팔 친구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도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북유럽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펜팔 친구를 소개받았는데 핀란드와 스웨덴 친구가 당첨된 것! 핀란드 친구는 편지에 나무와 호수, 빵 만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적어 보냈고, 스티커를 모으던 한국의 초등학생은 1980년대에 북유럽에서 보내준 스티커를 소장하였다.

심플하고 기능적인 북유럽 가구. 역시 책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심플하고 기능적인 북유럽 가구. 역시 책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책상 맨 위 열쇠 달린 서랍에 스티커를 보물처럼 모셔두며 북유럽을 꿈꿨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참 행복했던 거 같아요. 아무런 압박이 없었죠. 학교 갔다 오면 손발 씻고 나서 항상 전지를 펼쳐 놓고 앞뒤로 만화 같은 걸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신 저녁을 먹고, 만화를 보고 책을 읽었죠.”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의 여느 남자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지 못했던 그는 마케터로 일하며 재능을 펼쳤다. 자동차 브랜드 사브 재직 시절 대학생을 대상으로 디자인 공모전을 해서 멋진 도록을 제작했고, 명함 지갑과 우산, 옷 등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은 판촉물을 디자인했고, 베델스만에 다닐 때는 서울 종로와 강남에 북유럽 스타일로 인테리어한 서점을 만들었다.

사무실은 그간 수입한 물건과 샘플로 가득하다.

사무실은 그간 수입한 물건과 샘플로 가득하다.

물건 더미에서 10년 전 사브 브랜드 북이 나왔다. 누르면 튀어나와 펴지는 컵홀더의 움직임을 나비처럼, 운전하는 즐거움을 꼬마들의 그림으로, 엔진의 터빈을 꽃과 함께 찍고, 빨간 배경에 찍은 빨간 차 등, 그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었다는 브랜드 북은 디자인 감도가 대단했다. “필요 없을 수도 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하는 거예요.

10여 년 전 스웨던에서 만났던 작은 상자 가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정말 그냥 멍하니 서 있었죠. 상자의 미감 그리고 스웨덴의 평범한 할머니들이 그 상자를 사서 영수증, 아파트 열쇠를 넣어둔다는 것, 이런 상자를 집에 포인트로 둘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감동이었죠. 생활에 대한 존중 아니겠어요.”

(위) 오렌지와 스카이 블루 컬러, 서체까지 사무실 곳곳도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다. (아래) 6인치와 18인치. 사람 사이의 거리에 관한 프로젝트를 할 때 만든 보드.

(위) 오렌지와 스카이 블루 컬러, 서체까지 사무실 곳곳도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다. (아래) 6인치와 18인치. 사람 사이의 거리에 관한 프로젝트를 할 때 만든 보드.

그에게 물건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오래된 일기장은 기억을 되살려주고, 예쁜 상자는 라이프스타일을 담고 있다. 그런 이유로 물건이 쌓이고 모이는 것. 종일 물건을 보여주며 나눈 것은 물건에 담긴 정신,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에디터_이나래 | 사진_양성모
여성중앙 2017.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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