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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부모 모시려 귀향한 33년 한식요리사 솜씨 익산 ‘비비쭈꾸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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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한 김홍필 셰프의 익산 '비비쭈꾸미'의 대표메뉴인 '수제 돈까스 쭈꾸미'는 돈가스를 잘라 소스를 듬뿍 묻히고 주꾸미볶음을 얹어서 먹으면 맛이 잘 어우러진다고 알려줬다.

32년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한 김홍필 셰프의 익산 '비비쭈꾸미'의 대표메뉴인 '수제 돈까스 쭈꾸미'는 돈가스를 잘라 소스를 듬뿍 묻히고 주꾸미볶음을 얹어서 먹으면 맛이 잘 어우러진다고 알려줬다.

기차 타고 가서 익산역 플랫폼에 발을 디디기는 65일 모자란 40년 만이다. 지난 14일 김홍필(51) 셰프가 운영하는 ‘비비쭈꾸미(전북 익산시 오산면 무왕로2길 330/전화 063-842-2200)’를 찾아갔다. 경력 33년의 한식 조리사이고, 외식 창업컨설팅 회사(연합외식창업)를 창업해 대표를 맡아 15년째 운영 중이며, 한국외식경영학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돌연 귀향했다. 고향인 김제시 만경읍에서 가까운 익산에 음식점을 냈다. 음식 맛도 궁금하고 갑자기 낙향한 사연도 듣고 싶었다. 음식은 정성스럽고 양은 푸짐했다. 옹골찬 경력을 입증하듯 음식 구성이 좋고, 맛은 모난 구석 없이 구조가 잘 짜였다.

한 상 가득 '수제 돈까스 쭈꾸미 세트' 인기
대표메뉴는 수제 돈까스 쭈꾸미 세트(1만5000원/2인 이상 가능)와 소갈비 코다리찜(4만5000원)이다. 그의 아이디어로 재구성한 창작요리다. 음식을 주문하면 치킨샐러드, 묵사발, 도토리전, 생 연근동치미, 생 연근 할라페뇨 피클이 기본으로 먼저 차려진다. 돈까스 쭈꾸미 세트에는 밥과 비빔용 3색 나물(콩나물·무생채·곤드레 묵나물)이 더 나온다. 돈가스와 주꾸미볶음을 먹은 뒤 남은 양념으로 밥을 비벼 먹도록 메뉴를 설계했다.

수제 돈까스 쭈꾸미 3인분(1인 1만5000원). 왼쪽 돈가스 소스는 25가지 재료를 넣어 직접 만든다.

수제 돈까스 쭈꾸미 3인분(1인 1만5000원). 왼쪽 돈가스 소스는 25가지 재료를 넣어 직접 만든다.

수제 돈까스 쭈꾸미 세트 상차림. 샐러드·묵사발·도토리전·피클·동치미에 밥과 비빔용 3색 나물이 함께 차려진다.

수제 돈까스 쭈꾸미 세트 상차림. 샐러드·묵사발·도토리전·피클·동치미에 밥과 비빔용 3색 나물이 함께 차려진다.

진공포장 상태로 20일 이상 저온 숙성한 돼지고기를 잘라 칼집 내고 다진 마늘 발라 하루 재운 다음 빵 가루를 입혀 튀기기 직전의 돈가스.

진공포장 상태로 20일 이상 저온 숙성한 돼지고기를 잘라 칼집 내고 다진 마늘 발라 하루 재운 다음 빵 가루를 입혀 튀기기 직전의 돈가스.

메뉴를 그렇게 정한 까닭을 물었다. 입지와 상권, 겨냥한 고객층을 이유로 들었다. 음식점은 23번 국도(무왕로) 송학교차로 근처에 있다. 김제에서 올라와 익산시를 감싸고 금마교차로를 거쳐 호남고속도로 익산IC로 이어지는 길이다. 주소(익산시 오산면 장신리 23-11)만 보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보이지만 익산역 뒤로 2㎞ 남짓 위치에 있다. 전주까지 30㎞, 군산·김제는 20㎞ 거리다. 차 있는 사람들이 도심을 벗어나 접근하기 쉬운 전원형 음식점을 구상했다. 넓은 주차장 앞의 무왕로 너머로는 만경강을 끼고 발달한 김제평야가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들판이다. (※상호와 메뉴에는 ‘돈까스 쭈꾸미’라고 썼지만 표준어는 ‘돈가스 주꾸미’다. )

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샐러드.

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샐러드.

샐러드 토핑을 올리는 김홍필 셰프.

샐러드 토핑을 올리는 김홍필 셰프.

샐러드에 올릴 치킨, 연근 침과 절임.

샐러드에 올릴 치킨, 연근 침과 절임.

미리 준비해 냉장고에 둔 샐러드.

미리 준비해 냉장고에 둔 샐러드.

명절 없이 연중무휴…추석 손님에겐 선물  

술보다 음식에 중점을 두고 여성·가족 외식에 적합한 음식과 분위기를 고려했다. 직장인과 일반인들 점심용 간편 메뉴도 만들었다. 구상은 현재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손님 층도 예상한 대로이고, 익산 시내는 물론 김제·군산에서도 찾아온다. 평일엔 점심에 손님이 많고, 주말에는 종일 꾸준하다. 취재하러 간 지난 목요일(14일) 점심에는 50여개 좌석에 50%쯤 손님이 들었다. 맛있다는 반응이 많다고 했다. “배불러 못 걸어가겠으니 업어 달라”고 한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개업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연중무휴, 쉬는 날 없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 문을 연다. 사람은 쉬어도 음식점은 쉬면 안 된다는 게 김씨의 철칙이다. 돌아가면서 쉬고 휴일에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추석 열흘 연휴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식당을 연다. 이때 오는 손님에게는 선물도 돌린다. 보길도에서 작은 전복(규격 미달품은 값이 싸다)을 구입해 담근 전복장을 많이 준비했다. 떨어질 때까지 나눠줄 예정이다. 음식점은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IC, 호남고속도로 익산IC에서 15~20분이면 닿는다. 귀성·귀경 길이 맞으면 식사하고 가도 좋겠다.

이리역에서 1995년 이름을 바꾼 익산역 플랫폼. 남행열차가 빠져나가고 있다.

이리역에서 1995년 이름을 바꾼 익산역 플랫폼. 남행열차가 빠져나가고 있다.

익산역 2층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파란 망을 씌운 건물 자리에 있던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익산역 2층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파란 망을 씌운 건물 자리에 있던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익산역 전경.

익산역 전경.

50일 뒤면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용산역을 출발한 KTX는 1시간 4분만에 익산역에 도착했다. 역의 원래 이름은 1912년 3월 6일 개통 때부터 ‘이리역’이었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을 통합해 익산시로 지명을 바꿀 때 역 이름도 익산역이 됐다. 호남·전라·장항선과 호남고속선 철로가 만나고 분기하는 호남 철도교통의 허브다. 가는 동안 생각이 먼저 40년 전 ‘이리역’으로 달려갔다. 폭발사고 9일 뒤 본 역전 상가 풍경이 2015년 11월 10일 저녁 JTBC뉴스룸 ‘내일’ 코너에서 보여준 영상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087956) 과 중첩돼 살아났다.

1977년 11월 11일 저녁 9시 15분
'한국 vs 이란' 월드컵 예선전
이리 시민의 응원 함성은
굉음에 묻혔다
이리역 폭발사고
매캐한 화약냄새
뛰쳐나온 시민들
"북한군의 공습이다"
"원자폭탄이 터졌다"
'지옥의 불구덩이'
- 깊이 15m, 직경 30m
- 사망 59명, 실종 8명, 부상 1344명
- 가옥 1만3362개 동 중 70% 파손
다이너마이트 30톤
전쟁통이 된 이리
'무정차 원칙' 화약열차를 세워
역마다 '급행료' 뒷돈 요구
열차는 22시간 발 묶이고
홧김에 술을 마신 호송원
촛불 켠 채 화차에서 잠들었다
불 댕긴 호송원은 도망가고…
삼남매 잃고 통곡하는 엄마
드레스 대신 소복 입은 신부
거센 민심 후폭풍에
곧장 수습 나선 정부
'새이리 건설 계획'
평당 1만원→ 10만원
잇속은 브로커가 챙겼다
난리통에 이런 일도 있었다
이리역 삼남극장 '하춘화쇼'
여가수를 구해 낸 무명 MC
영화 같은 '스타 탄생'
그가 바로 이주일이었다

대입 예비고사 다음날 폭발…9일 후 찾아가
‘이리역 폭발사고’ 전날인 1977년 11월 10일 목요일은 1978학년도 대입 예비고사 날이었다. 나는 수험생이었다. 당시 대입제도는 예비고사 점수를 안고 자신이 대학을 선택해 국영수(학교에 따라 사회, 제2외국어 포함) 본고사를 치러 합격을 해야 입시가 끝나게 돼 있었다. 예비고사가 끝나면 바로 ‘진짜 실력’을 연마하는 본고사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사고 9일 뒤인 11월 20일 일요일,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대전역에서 군산 가는 기차(지금은 없어진 노선)를 타고 이리역에 내렸다.

이리역 폭발사고 다음날인 1977년 11월 12일자 중앙일보 1면. 내용 전체가 사고 소식이다. [중앙포토]

이리역 폭발사고 다음날인 1977년 11월 12일자 중앙일보 1면. 내용 전체가 사고 소식이다. [중앙포토]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 당시 기차 선로에 분화구처럼 파인 깊이 15m, 직경 30m의 웅덩이. [중앙포토]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 당시 기차 선로에 분화구처럼 파인 깊이 15m, 직경 30m의 웅덩이. [중앙포토]

역사의 현장을 직접 봐야겠다는 일념이 나를 이끌었다. 사회 선생님이 수업 중에 자주 한 얘기가 귀에 쟁쟁했다. 대구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를 나온 40대 중반의 선생님은 광복, 6·25, 4·19, 5·16 같은 현대사의 중요 대목을 설명할 때면 늘 “내가 그때 XXX에 있었다 아이가. 그걸 본 기라. 내는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기라”라고 자랑처럼 말했다. 그게 좋아 보였던 것 같다. 공부에 싫증 날 때도 됐겠다, 엄청난 폭발사고였으니 역사적 사변이라고 멋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에 당시 신문을 찾아보니 실제 그렇기도 했다.

기차가 임시선로를 타고 이리역으로 들어가며 속도를 줄일 때 창 밖을 살펴보니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학교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다. 남성고와 남성여고였다. 역에서 900m쯤 떨어진 학교 건물 일부가 붕괴됐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번에 보니 그 자리엔 남성맨션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학교는 역에서 직선거리 2.5㎞ 멀리에 새 건물을 지어 1980년 2월 이전했다.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 때 근처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폭발의충격으로 천장이 내려앉고 의자가 모두 뒤로 넘어졌다. 이 극장에서만 5명이 사망했다. 주인 잃은 신발들이 널려있다. [중앙포토]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 때 근처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폭발의충격으로 천장이 내려앉고 의자가 모두 뒤로 넘어졌다. 이 극장에서만 5명이 사망했다. 주인 잃은 신발들이 널려있다. [중앙포토]

삼남극장 자리에 지은 10층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고 그 옆에 새로운 극장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삼남극장 자리에 지은 10층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고 그 옆에 새로운 극장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길바닥에 누운 극장 간판엔 하춘화 그림
역을 나서니 거리는 폐허였다. 건물은 성한 게 없고 간판들은 모두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번화가인 역전 창인동 상가(현 중앙로1길)로 갔다. 밟히는 건 부서진 간판과 깨진 유리조각들뿐이었다. 조금 들어가자 극장 페인트 간판이 유리조각들을 뒤집어쓴 채 길바닥을 덮고 있다. 밟고 지나가며 보니 익숙한 여가수 얼굴이 보였다. 하춘화였다.
그는 다이나마이트 30t이 터진 그날 밤 9시 15분, 230m 떨어진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10곡쯤 부르고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굉음과 함께 극장 천장이 내려앉았다. 대기실에 있던 그는 고립됐다. 그때 리사이틀 사회를 보던 이주일이 자신도 후두부 두개골 함몰이라는 큰 상처를 입고도 몸을 굽혀 등을 밟고 하춘화가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는 얘기도 있다).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하춘화가 이주일을 각별히 생각하고 연예활동을 도와 ‘코미디의 황제’로 성장하는 디딤돌을 놓아줬다고 한다. 이 일은 연예계의 미담으로 두고 두고 회자됐다. 그날 700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던 삼남극장에서만 5명이 죽었다.

삼남극장이 있던 곳과 이어진 익산 중앙시장.

삼남극장이 있던 곳과 이어진 익산 중앙시장.

50일만 지나면 폭발사고 40주년이다. 사고 이후 이리시는 몰라보게 변했다. 하춘화 얼굴 그림을 밟고 지나간 골목을 못 찾아 근처를 지나가는 70대 부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극장 있었죠?” 바로 알아듣는다. “삼남극장요? 저 다음 길로 들어가 100m쯤 가면 있어요. 새로 지어서 백화점도 하고 그랬지요.” 그 자리에 들어선 10층 건물은 리모델링 중이었다. 요양병원을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건물 옆에는 다른 기업이 극장을 짓고 있었다. 40년 전 이리역 바로 뒤 송학동에 살았다는 부부는 “갑자기 번쩍 하더니 엄청난 소리가 들리면서 안방 문짝이 방 안쪽으로 뚝 떨어졌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1985년 한식 입문…32년 만에 귀향해 개업  
그런 사변을 치른 도시 익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김홍필 셰프는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가 고향이다. 고향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85년 한식요리에 입문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아 늘 요리의 세계가 궁금했다. 그런 터에 아는 사람이 “앞으로 한식이 대세가 되는 시절이 온다. 해 봐라”고 권유해 한식을 시작했다. 군대에 가서도 장교식당과 연대장 관사 취사병으로 요리를 계속했다. 전역 후 호텔에 근무하다 서른이던 1995년 늦깎이로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 조리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했다. 졸업 후에는 타워호텔, 강남 노보텔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2003년 호텔을 퇴직하고 외식 창업컨설팅 회사(연합외식창업)를 창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입지 선정, 메뉴 채택, 레시피 세팅, 조리 교육까지 일괄로 음식점을 창업해 주는 풀 턴 키(full turn key) 방식으로 컨설팅을 한다. 중국·미국·일본·프랑스 등 해외 외식업체에 가서 한식을 지도하는 일도 병행했다. 2014년에는 연매출 7000억원 규모의 태국 유명 외식기업 수키시(Sukishi)그룹에 한식 메뉴를 개발해 전수하기도 했다.

김홍필 셰프가 2014년 태국 외식기업 수키시(Sukishi)그룹에 한식 메뉴를 개발해 전수하러 갔을 때 그곳 관계자들과 찍은 사진.

김홍필 셰프가 2014년 태국 외식기업 수키시(Sukishi)그룹에 한식 메뉴를 개발해 전수하러 갔을 때 그곳 관계자들과 찍은 사진.

그의 활동과 생각들을 정리한 블로그 ‘요리 선생의 맛있는 이야기(http://blog.naver.com/samkig)’를 보면 그런 내용이 상세히 나와있다. ‘요리 선생 레시피’ 카테고리에는 ▷전라도식 토끼탕 만드는 법 ▷가정에서 추어탕 끓이기 ▷어머니와 담그는 전라도 고구마순 김치 담그는 법 ▷도라지 손질 법과 쓴맛 빼는 법 등 실생활에 유용한 레시피 56가지가 올라와 있다. 내용이 좀 간단한 ‘도라지 쓴맛 빼는 법(http://blog.naver.com/samkig/220080733976)’을 보면 이렇다.

블로그에 빼곡한 33년 내공 레시피  
“도라지 쓴맛을 없애기 위해 소금 넣고, 문지르고, 담가 놓고, 힘드셨죠. 도라지가 맛은 좋은데 쓴맛 때문에 꺼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30년 전문가의 비법을 공개하겠습니다. 도라지 쓴맛을 제거하는 비법은 설탕입니다. 손질된 도라지에 설탕이 충분히 묻을 수 있게 넣고 골고루 버무려 주세요. 물이나 다른 것은 넣지 말고, 박박 문지르지도 마세요. 골고루 버무려 20~30분 그대로 두면 쓴맛이 제거돼요. 도라지 맛은 변화 없고 쓴맛은 사라져요. 절인 도라지를 찬물에 두세 번 헹궈서 물기를 제거하고 무침이나 비빔밥에 넣어 드시면 됩니다. 데쳐서 쓰려면 헹군 도라지를 끓는 물에 데쳐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때는 한두 번만 헹구세요. 마른 도라지도 불린 다음 같은 방법으로 설탕에 20~30분 버무려 놓으면 됩니다.”

음식점 현관에는 주인 김홍필 셰프 프로필을 알리는 홍보물이 걸려 있다. 경력이 다채롭다.

음식점 현관에는 주인 김홍필 셰프 프로필을 알리는 홍보물이 걸려 있다. 경력이 다채롭다.

깔끔한 액자에 넣어 벽에 건 메뉴판. 같은 인쇄물을 식탁 깔개로도 쓴다.

깔끔한 액자에 넣어 벽에 건 메뉴판. 같은 인쇄물을 식탁 깔개로도 쓴다.

점심에는 직장인들을 위한 간편 메뉴가 따로 있다.

점심에는 직장인들을 위한 간편 메뉴가 따로 있다.

점심 간편 메뉴인 수제 돈까스 비빔밥 세트(8500원).

점심 간편 메뉴인 수제 돈까스 비빔밥 세트(8500원).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8월 고향의 부모님 집에서 20㎞ 거리에 음식점을 내면서 귀향했다. 만 50세가 되는 해였다. 공자가 일생을 돌아보면서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고 했다. 그도 천명을 알았을까. “안정과 정착을 바라는 마음이 컸다. 기술지도나 전수 말고 내 실력을 손님들에게 선보이고 평가 받아보고 싶었다. 서울보다 창업 비용이 덜 들어 고향 근처를 택했다. 특히 부모님이 연로했는데 돌볼 형제도 없고,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있어 책임감을 떨칠 수 없었다.”

165㎡(50평) 홀에 식탁을 널찍널찍하게 배열했다.

165㎡(50평) 홀에 식탁을 널찍널찍하게 배열했다.

단독으로 쓰는 음식점 건물은 가든을 운영하다 실패한 곳이다. 빈집을 빌려 시작했다. 전체 265㎡(80여 평)에 식당 홀이 165㎡(약 50평) 크기다. 임대료는 서울의 20% 수준인데 매출은 수도권 유사 점포보다 많다. 미혼인 그는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음식점으로 출퇴근한다. 그러느라 블로그 활동은 2016년 1월 18일에서 멈춰있다.

식재료와 소스 '기성품 배제'가 원칙  
음식의 디테일과 완결성을 그는 강조했다. 지방 중소도시 외진 곳에 있는 음식점이지만 그릇은 모두 여주 도자기 가마에서 맞춰왔다. 사람들은 무겁다, 깨지기 쉽다며 기피하지만 고객이 좋아하니까 감수한다고 했다. “남들이 안 쓰는 걸 써야 돋보인다. 기본부터 충실해야 거기 담기는 음식이 맛있게 보인다. 그래서 예쁜 그릇부터 준비했다.”

각종 드레싱 소스와 양념들도 기성품 안 쓰고 만들어서 쓰는 것이 원칙이다. “음식 맛의 구조가 고르고 일관성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음식을 스스로 용납 못한다. 재료부터 양념, 조리까지 맛의 요소를 탄탄히 쌓아야 한다. 100% 그럴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한다”고 했다. 돈가스 소스의 경우 버터·사과·파인애플·바나나·당근·양파·양송이 등 25가지 재료를 넣어 2~3시간에 걸쳐 만든다. 끓이는 시간만 40분 걸린다. 기성품 어떤 것도 섞지 않는다. 음식 이름과 상호에서 ‘수제(手製)’를 강조하는 이유다. 만들 수 있는 것은 기성품 쓰지 않고 손으로 만들어서 음식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돈가스는 고기를 진공포장 상태로 20일 이상 저온 숙성해서 만든다. 그 고기를 잘라 칼집 내고 다진 마늘을 발라 하루쯤 재운 다음 빵 가루를 입혀서 튀긴다.

기성품을 쓰는 것은 김치뿐이라고 했다. 이 집은 김치가 반찬으로 나오지 않는다. 김치는 묵사발 고명으로 조금 들어갈 뿐이다. 쓰는 양이 많지 않은데 조금씩 담글 수가 없어서 사서 쓴다고 했다. 여름 메뉴인 메밀국수에 쓰는 고추냉이는 생 뿌리를 갈아서 만든 냉동제품을 쓴다. 국물은 일본제 기꼬만 간장으로 만든다. 국산 고급품보다 맛이 좋은데 값은 싸서 일본 제품을 쓴다고 했다.

연근 가운데 생으로 조리해 먹기 좋은 위 두 토막을 보여주는 김홍필 셰프. 토막이 긴부분 보다 통통하고 섬유질이 적어 아삭거린다.

연근 가운데 생으로 조리해 먹기 좋은 위 두 토막을 보여주는 김홍필 셰프. 토막이 긴부분 보다 통통하고 섬유질이 적어 아삭거린다.

고향에서 생산된 연근 다양하게 활용  

서울이던 주소지를 지난달 말 고향으로 옮겼다. 완전한 귀향이다. 컨설팅회사를 접지 않고 음식점과 병행하지만 그것도 고향에서 하기로 했다. 식재료도 지역 물건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그 중 하나가 연근이다. 상에 반찬이 여러 가지 오르지는 않지만 연근을 다양하게 쓰고 있다. 생 연근 동치미, 생 연근 할라페뇨 피클이 고정 반찬이다. 생 연근 절임과 연근 칩을 샐러드에 올리고, 세트 메뉴에 나가는 묵사발에도 생 연근 절임이 들어간다.

연근은 하나같이 연하고 아삭아삭하다. 보통 먹는 연근과 질감이 다르다. 비밀이 있었다. 연근 전체 중에 위 두 토막만 쓴다. 한 토막 길이가 한 뼘 안 되게 짧다. 보통 시장에 나오는 연근은 그 아래 뿌리다. 토막 길이가 두 뼘이 넘는다. 둘은 차이가 있다. 토막이 짧은 것은 섬유질이 적어 생으로 먹기에 맞고, 긴 것은 섬유질이 많아 익히는 요리에 맞다고 한다. 토막이 짧은 연근은 모양도 안 좋고 껍질 벗길 때 손이 많이 가서 시장에서 환영하지 않는다. 잘 팔리지 않는 연근을 생으로 조리해 홀대 받던 식재료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낸 것이다. 냉장고에서 연근을 꺼내 깎으면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생 고구마 질감인데 즙이 많고, 명주실 같은 섬유질 가닥이 줄줄 나왔다.

연근피클과 연근동치미.

연근피클과 연근동치미.

연근동치미 담그는 방법을 알려줬다.
①물에 소금·인공감미료(뉴슈가)를 풀어 간과 단맛을 맞춘다. ②밀가루 풀을 약간 넣는다. 찹쌀 풀은 삭지만 밀가루 풀은 삭지 않는다. ③생 연근(연잎 바로 아래 두 토막)을 잘라서 절이지 않고 넣는다. 연근에서 전분이 뽀얗게 나오므로 밀가루 풀은 조금만 넣는다. ④사과·배·양파·마늘·생강을 갈아서 망에 담아 즙만 짜서 넣고 익힌다. 과일은 발효를 거치면서 독특한 산미를 내고 향도 좋다. ⑤상에 내기 전에 오이·당근·홍고추 등을 저며 띄운다.

소갈비 코다리찜. 4만5000원 받는 소(小)인데 3명이 먹기에 넉넉한 양이다.

소갈비 코다리찜. 4만5000원 받는 소(小)인데 3명이 먹기에 넉넉한 양이다.

소갈비 코다리찜 상차림. 샐러드·묵사발·도토리전·피클·동치미가 함께 나온다.

소갈비 코다리찜 상차림. 샐러드·묵사발·도토리전·피클·동치미가 함께 나온다.

코다리 두벌 튀김을 하는 김홍필 셰프.

코다리 두벌 튀김을 하는 김홍필 셰프.

소갈비 코다리찜에 쓰려고 반죽 입혀 초벌 튀김을 해둔 코다리.

소갈비 코다리찜에 쓰려고 반죽 입혀 초벌 튀김을 해둔 코다리.

소갈비 코다리찜은 소갈비와 코다리를 이용해 아귀찜처럼 조리한 음식이다. 소갈비는 찜을 하듯 1차 익혀 둔다. 코다리는 토막 내서 밀가루반죽을 입혀서 초벌 튀김을 해 둔다. 새우·미더덕과 생선 이리 등은 미리 익혀둔다. 주문이 있으면 갈비는 데우고 튀겨 둔 코다리는 두벌 튀긴다. 세 가지 재료와 콩나물을 섞고 가열하면서 매운 양념으로 버무린다. 맛도 좋지만 양이 아주 푸짐해서 3~4명이 술 한잔 하고 밥을 비벼 먹어도 모자라지 않겠다.

재료 맛 살리는 전라도식 조리법이 바탕  
외식업 창업과 요리 강의, 자영업자 컨설팅을 오래 한 그는 “우리나라 식재료로 하는 모든 요리를 누구보다 맛있게 할 수 있다. 33년째 요리를 하면서 터득한 원리가 있고 그것이 나의 장기라고 생각한다. 동치미는 사흘 만에, 백김치를 일주일 만에 자연재료만 가지고 익히는 비법도 있다”고 자부했다. 또 전라도 음식을 팔고 있진 않지만 요리의 바탕은 전라도 음식의 원리라고 했다. 원리의 첫째가 ‘잡탕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곳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맛을 내려 하지만 전라도 음식은 중심재료 하나에 무나 고추 정도, 한두 가지만 더 넣어 원재료의 맛을 살려낸다고 했다. 둘째는 재료가 100가지면 100가지 음식이 나오는 원리다. 재료마다 특성을 살리는 조리법으로 맛을 낸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음식을 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왜 그렇게 했는지 요리를 할수록 절실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비빔용 3색 나물과 연근동치미, 연근피클이 추가로 필요하면 덜어갈 수 있게 준비해뒀다.

비빔용 3색 나물과 연근동치미, 연근피클이 추가로 필요하면 덜어갈 수 있게 준비해뒀다.

냉장고에 준비해둔 비빔용 3색 나물.

냉장고에 준비해둔 비빔용 3색 나물.

국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둔 묵사발.

국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둔 묵사발.

묵사발에도 생 연근 절임이 들어간다.

묵사발에도 생 연근 절임이 들어간다.

화학조미료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다. 다만 비보도(Off the record)라고 못박아 내용을 기사로 쓸 수는 없다.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음식점 창업과정 강의를 하다가 특정 화학조미료 얘기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중도에 잘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화학조미료가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쓰든 안 쓰든 이유와 원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MSG계열 화학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왜 목이 마른지 물었다(내가 겪는 증상). “과학적 검증은 아니고 경험적 결론인데, 화학조미료를 넣으면 짠맛이 상쇄된다. 소금을 30~50% 더 넣어야 간이 맞는다. 짜게 먹었으니까 물을 찾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화학조미료 자체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경험으로 보면 소금을 더 먹게 돼 물을 찾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요리사로서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의욕이 다부졌다. “만33년 요리를 했지만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생각나면 적어놓고 적용해보면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 여전히 배우고 호기심도 많다. 진화하려면 뭐라도 해봐야 한다. 그래야 내 방식이 나온다. 나만의 방식 없이 남 하는 대로 따라 할 거면 식품점에서 사다 쓰는 게 낫다. 맛과 건강이 함께 하는 음식을 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외식업과 관련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고향을 지키면서 할 계획이다. 남들은 할 게 없다지만 내 눈에는 많이 보인다.”

복원을 위해 해체하기 전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진 문화재청]

복원을 위해 해체하기 전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진 문화재청]

세계유산 미륵사지·왕궁리유적 가까워

음식점 앞 무왕로 상행선을 10여분 달리면 금마면이 나온다. 마한·백제시대부터 근대 철도교통이 열리기 전까지 2000년 가까이 이 일대의 중심지였다. 긴 시간의 유적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 유적 중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이곳에 있다(나머지는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사지).

공중에서 내려다본 미륵사지 전경. [사진=문화재청]

공중에서 내려다본 미륵사지 전경. [사진=문화재청]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다. 백제 무왕(600∼641년) 때 미륵산 남쪽 33만㎡(10만평) 너른 터에 35년 동안 창건한 백제 최대의 사찰 자리다. 거기 있는 백제 말기 석탑(국보 제11호)은 한국 석탑의 시원 양식이자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 땅에 불탑 양식이 전개되면서 목탑이 석탑으로 옮겨가는 단계의 짜임새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1998년 안전진단을 하니 1300년 세월의 풍상에 시달려 더는 그냥 둘 수 없는 상태였다. 해체·조립을 시작해 돌 조각 2400여 개를 헐고 짜맞추기를 20년째 하고 있다. 내년 이맘때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익산시 금마면 왕궁리유적 전경. 땅속에 수많은 역사의 증거를 비장한 채 오층석탑만우뚝하다. 1989년부터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중앙포토]

익산시 금마면 왕궁리유적 전경. 땅속에 수많은 역사의 증거를 비장한 채 오층석탑만우뚝하다. 1989년부터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중앙포토]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진을 보내준 신명식 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은 “석양에 보면 장엄하다”고 알려줬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진을 보내준 신명식 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은 “석양에 보면 장엄하다”고 알려줬다.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은 1989년부터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구가 나와 관심을 끌었다. 유적이 있는 왕궁리 언덕 일대는 마한 또는 백제 궁궐이 있던 터라고 전하는 왕궁평이다. 그 안에 건립 시기가 모호한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있다. 김제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신명식(61) 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은 내가 그쪽에 갈 일이 있다고 하자 “해질 무렵 왕궁리 오층석탑은 꼭 보시길. 말 그대로 장엄!”이라고 추천했다. 『두산백과』는 건립 시기를 “옛 백제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금마에는 백제 무왕(즉위 전에는 서동) 관련 유적이 특히 집중돼 있다. 미륵사지도 있지만 서동 탄생설화의 무대인 마룡지(연동제)와 생가 터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쌍릉(사적 제87호)도 있다. 서동의 어머니가 마룡지(일명 용샘) 연못 가에 혼자 살았는데 못에 사는 용과 교통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얘기가 여러 기록에 전한다. 하루나 한나절쯤 돌아보기에 맞춤한 역사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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