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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가장자리부터 곪는다, 국경 3부작 완결편 '윈드 리버'

중앙일보

입력

맨발로 설원을 달리던 소녀가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이곳은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의 윈드 리버 산맥. 법의 감시도, 신의 가호도 닿지 않는 오지다.

테일러 쉐리던의 #국경 3부작 완결편 '윈드 리버'

‘윈드 리버’(원제 Wind River, 9월 14일 개봉)는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이 두 번째로 연출한 장편영화. 그가 각본을 썼던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 드니 빌뇌브 감독, 이하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에 이은, 미국 국경 지대가 배경인 ‘국경 3부작(Frontier Trilogy)’의 마지막 영화다.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쉐리던은 ‘윈드 리버’와 국경 3부작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 그의 숨은 의도를 짚었다.

'윈드 리버 '

'윈드 리버 '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윈드 리버 산맥.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는 사냥 도중 우연히 눈 덮인 평원에서 인디언 소녀의 변사체를 발견한다. 3년 전 비슷한 사건을 목격했지만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코리. 신참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이 사건 조사를 위해 급히 파견되지만, 윈드 리버의 험준한 산길을 그 홀로 누빌 수는 없다.

자신을 ‘포식동물 사냥꾼’으로 소개한 코리에게 제인이 묻는다. “한 마리 더 잡지 않겠느냐”고. 영화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대자연 속, 소녀의 죽음을 추적하는 사냥꾼과 FBI 요원의 공조를 건조하게 따라간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 (오른쪽)

테일러 쉐리던 감독 (오른쪽)

배우·감독 등 다양하게 활약했지만 테일러 쉐리던은 각본가로서 명성이 높다.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단 두 편으로, 그는 불과 2~3년 사이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세계적 작가로 뛰어올랐다. 드니 빌뇌브, 데이비드 맥켄지 등 걸출한 감독들의 재능을 빌려오긴 했지만, 두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바로 각본가 쉐리던에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윈드 리버’는 쉐리던이 집필한 국경 3부작 중 유일하게 그가 각본과 연출을 겸한 작품이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 첫 선을 보인 이 영화는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한 스릴러’(타임) 같은 평단의 찬사 속에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윈드 리버'

'윈드 리버'

마블 히어로영화 ‘어벤져스’ 시리즈(2012~)로 유명한 제레미 레너와 엘리자베스 올슨의 협업도 화제가 됐다. 이미 각각 ‘허트 로커’(2008, 캐스린 비글로 감독)와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2011, T 숀 더킨 감독)으로 탁월한 연기력을 입증한 배우들이다. 앞서 에밀리 블런트, 크리스 파인이 각각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를 통해 배우로서 눈부신 도약을 보여줬듯, 마블의 코스튬을 벗은 레너와 올슨 역시 절제와 폭발을 오가는 감정 연기를 탁월하게 펼쳐 보인다. 여기엔 쉐리던이 창조한, 입체적인 캐릭터의 힘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환경은 인간을 침식한다

'윈드 리버'

'윈드 리버'

쉐리던의 국경 3부작은 무엇보다 ‘공간’에 주목한다. ‘모스트 바이어런트’(2014, J C 챈더 감독) ‘빅 쇼트’(2016, 아담 맥케이 감독) 같은 영화들이 각각 1970년대 오일 쇼크나 2008년 금융 위기 등 굵직한 경제적 재난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실패를 시간축으로 종주했다면, 쉐리던은 미국 주류 사회의 시선과 관심이 닿지 않는 동시대의 변방을 공간축으로 횡단한다. 신의 징벌처럼 뜨거운 태양볕이 내리쬐는 멕시코 국경 도시 후아레즈(‘시카리오’), 삶 자체가 증발한 것 같은 텍사스주의 황폐한 풍경(‘로스트 인 더스트’)을.

장엄하지만 위험천만한 윈드 리버 산맥도 마찬가지다. 쉐리던이 3부작을 통해 보여 준 세 가지 국경은, 현대 미국 사회에 도사린 염증이 하나둘씩 곪아 터지는 병변(病變)의 발원지다.

'윈드 리버'

'윈드 리버'

‘시카리오’는 미국의 중남미 마약 정책이 초래한 법 집행기관의 실패와 변질을, ‘로스트 인 더스트’는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은행의 횡포로 존엄을 잃고 추락한 소시민들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윈드 리버’에서, 쉐리던은 코리와 제인의 동행을 통해 “인간이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땅에 정착했을 때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치안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넓은 관할 구역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경찰 인력, 정부의 원주민 이주 정책 때문에 협지로 내몰리는 인디언 부족들의 비참한 현실, 통계 자료조차 없는 인디언 여성 실종 사건 등. 감독으로서 쉐리던은 이전 국경 3부작 시리즈처럼 “오늘날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인 국경 지역, 즉 인간이 개척한 환경이 거꾸로 인간을 침식하는 풍경을 건조하게 담는다.

‘윈드 리버’의 각본을 위해 6개월간 인디언 보호 구역에 머물기도 했던 쉐리던은 계속해서 인디언 문제를 통해 현대 미국을 진단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제작과 각본을 맡은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10부작 드라마 ‘옐로스톤’(내년 방영 예정, Paramount Network)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인디언 거주 구역이 배경이니 말이다.

국가의 실패가 조성한 지옥의 생태계

'윈드 리버'

'윈드 리버'

미국 서부 산맥의 절경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윈드 리버’는 좀 더 다른 의미에서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카메라는 목표를 노리는 코리의 동선을 먼곳에서 롱숏으로 관찰한다. 반대로, 거칠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을 희생자의 시선처럼 묘사한다. 마치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한 이 같은 촬영 방식은, 약육강식의 법칙 외에 그 어떤 규범도 통하지 않는 변방의 살풍경을 스산하게 그린다. 그들만의 고유한 규율과 도덕을 따르는 자치령, 혹은 선악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혼탁해진 생태계를 말이다.

'윈드 리버'

'윈드 리버'

‘시카리오’의 엔딩에서, 마약 카르텔 전문가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정의 구현과 현실적 타협 사이에 갈등하는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여긴 늑대들의 땅이오. 그리고 당신은 늑대가 아니지.”

국경 3부작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다양한 결단을 내린다. 케이트처럼 적응에 실패하고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로스트 인 더스트’의 토비(크리스 파인)처럼 생존을 위해 자신의 보호색을 바꿔 간다. 혹은 코리와 알레한드로처럼, 환경을 장악하고 조용하게 먹잇감을 찾아 움직이는 포식자도 있다.

이처럼 쉐리던은 정치·사회·환경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힌 현실 세계의 지옥도를 관객에게 직시하게 한다. 소녀의 죽음에 얽힌 실마리가 풀리는 ‘윈드 리버’의 클라이맥스가, 관객에게 희열이나 통쾌함 대신 불편하고 씁쓸한 감정을 안기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윈드 리버’로 막을 내린 국경 3부작은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을 주춧돌 삼아 세운, 자본주의 사회의 허약한 기반을 향한 작가 쉐리던의 경고다.

'윈드 리버' 관람 전 체크 필수! '국경 3부작' 시리즈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여성 FBI 요원 케이트의 시선을 통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CIA와 마약 카르텔의 추악한 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매 장면 차고 강렬하게 관객의 심장을 죄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이 압권. 각본가 쉐리던의 화려한 경력도 이때 처음 시작됐다. ‘시카리오’의 속편 ‘솔다도’(스테파노 솔리마 감독)의 각본 역시 쉐리던이 집필할 예정.

'로스트 인 더스트'

'로스트 인 더스트'

'로스트 인 더스트'
토비와 태너(벤 포스터) 형제가 자신들의 터전인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은행 강도가 되는 과정을 건조하게 그렸다. 목장 산업의 쇠퇴로 황폐해진 텍사스를 배경으로, 은행의 탐욕과 자본주의의 실패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새로운 서부극의 탄생’이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처음 쉐리던의 이름을 올린 작품.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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