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더 플라자 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인 세븐스퀘어의 주방. 한복 차림의 노부인이 나물 한 젓가락을 맛보더니 한 마디 했다. “이건 식초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순간 주변의 젊은 셰프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호텔 더 플라자·농촌진흥청 공동진행 '종가 음식' 프로모션 #집안마다 특별한 비법,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없는 음식 #삼남지방 12개 종가의 종부와 호텔 셰프들의 협업 #제일 힘들었던 건 종부의 외출 허락을 받는 일 #"종부가 집을 비우면 내 밥은 누가 해" 종손 한마디에 #문중 어른들 모두 모셔놓고 대형 기획 PT까지 열어
머리 희끗한 수석 셰프와 40명의 휘하가 나물 양념 맛 하나를 딱딱 못 맞췄다? 그건 아니다. 오늘 나물 양념의 장맛이 좀 특별해서다. 전남 담양의 장흥 고씨 학봉 고인후 종가(宗家)에 대대로 내려온 장을 사용했다. 나물 한 젓가락으로 셰프들을 긴장시킨 노부인은 이 집안의 이숙재(70) 종부(宗婦)다.
호텔의 젊은 셰프들과 70대 종부의 특별한 만남은 더 플라자가 농촌진흥청과 공동으로 9월부터 3개월간 진행하는 ‘한국 전통 종가 내림음식 프로모션’ 때문이다. 지난 7일부터 매주 목·금·토요일에 뷔페 레스토랑 세븐스퀘어에 방문하면 1주일에 한 곳씩 삼남지방 12종가의 내림음식을 20여 종씩 맛볼 수 있다. 해당 종가의 종부는 나흘간 호텔에 머물며 셰프들과 손발을 맞춘다. 특급호텔이 종가 음식 이벤트를, 그것도 한꺼번에 12명의 종부를 직접 모시고 진행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세븐스퀘어의 김용수(51) 수석 셰프와 김창훈(38) 조리기획 셰프를 만났다.
오래 전부터 이 프로모션을 기획한 김창훈씨는 “종가 음식에는 그 집을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음식들이 많다”며 “이것을 서울로 옮겨와 고객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더 플라자의 셰프들이 종부에게서 직접 재료 선택부터 손질·요리법까지 배운다면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인 종가의 내림 음식 문화 계승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김씨는 두 달 간 삼남지방의 종가를 찾아다녔다. 그중 음식사업을 하는 곳, 종부는 있지만 도시에서 일 하느라 시어머니께 음식 대물림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곳 등을 배제하고 총 12종가를 선정했다. 김씨는 “많게는 30번의 제사를 모시는 종부들의 스케줄 맞추기가 녹록치 않았다”며 “그중 가장 넘기 힘든 산은 종손과 문중의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김씨가 어느 종가의 종손에게 프로모션 내용을 설명하고 종부의 외출을 나흘간만 허락해 달라 청했더니 “종부가 집을 비우는 동안 내 밥은 누가 하나” 묻더란다.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김씨는 종가의 문중 어른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에 참석해 프로모션 내용과 가치, 의의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PT를 한 후 겨우 허락을 받고 종부를 모실 수 있었다.
종부와의 실질적인 협업은 세븐스퀘어의 김용수 수석 셰프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김 수석 셰프는 “처음부터 한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종가 음식은 장맛이니 종부님들은 간장·된장·고추장 등 양념 일체를 직접 가져오시고, 맛에 관한 한 셰프들은 무조건 종부님의 결정을 따르라고 했죠. 종가 음식의 본질(맛)을 해쳐서는 안 되니까요. 대신 셰프들은 멋을 책임지기로 했죠.”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부는 깍둑썰기로만 냈던 감장아찌를 셰프들은 얇게 저며서 꽃잎처럼 말아 냈다.
김 수석 셰프는 “이번 프로모션의 가치는 서로가 발전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라는 점”이라며 “셰프들은 전공과는 상관없이 200여 종의 종가 음식을 공부할 수 있고, 하던 대로만 해오던 종부는 현대적 계량·저장·해동·조리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종가음식의 계승·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호텔 더 플라자는 이번 프로모션을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내지 않을 계획이다. 쿠킹 아카데미 등 종가 내림 음식 계승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하면서, 한옥 스테이를 운영하는 종가에는 예약 사이트 관리 및 인테리어·꽃꽂이·침구청소 등 숙박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지속적인 상호 네트워크를 이어갈 예정이다.
참고로 7일 시작한 시즌 1 ‘섬김’의 첫 번째 종가는 전남 담양의 장흥 고씨 학봉 고인후 종가로 민어탕·죽순전·감장아찌·단술(모주) 등 총 23가지의 내림음식을 선보였다.
2주차에는 경북 영덕의 재령 이씨 갈암 이현일 종가의 김호진 종부가 사골김치·문어쇠고기대게탕·육포보푸름·문어숙회 등 22종의 음식을 선보일 예정이다.
3주차에는 경북 예천의 안동 권씨 춘우재 권진 종가의 조동임 종부가 국화청주·산나물콩가루국·꿩물김치·가지불고기 등 23가지 음식을 준비한다.
4주차에는 경북 안동의 진성 이씨 노송정 이계양 종가의 최정숙 종부가 단호박감주·아카시아꽃튀김·소고기수삼말이·족편 등 22가지의 내림음식을 직접 선보인다. 세븐스퀘어를 방문하는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하며 가격은 성인 점심 기준 8만8000원(세금&봉사료 포함)부터.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