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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린보이' 진모영 감독, "당신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진모영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진모영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평화·생명·소통의 축제,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이하 DMZ영화제)가 9월 21일(목)부터 28일(목)까지 8일간 경기도 고양·파주·김포·연천 일대에서 열린다. 42개국 114편을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의 첫 문을 여는 개막작 ‘올드마린보이’. 3년 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이하 ‘님아’)로 역대 개봉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진모영(47) 감독의 신작이다.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 '올드마린보이' #진모영 감독 인터뷰

탈북자 출신 ‘머구리’(잠수를 뜻하는 일본어 もぐる(모구리)에서 비롯된 옛말) 박명호(52)의 삶을 다룬 이 다큐는, 이번 DMZ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후 11월 극장 개봉할 예정이다. ‘님아’에 이어 현대 한국인을 조명한 진 감독을 DMZ영화제 개막 전 제작사 ‘영화사님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3년 만의 차기작이다. 공개를 앞둔 심정은.
“이 영화에 거의 4년을 쏟았다. 좀 더 일찍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는데, 찍으면 찍을수록 욕심이 나서 늦어졌다. 3년 전 DMZ영화제에 ‘님아’를 한국경쟁 부문에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개막작으로 관객을 맞이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

-‘님아’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이번 작업을 병행했다고 들었다.
“맞다. 2013년 11월 무렵 KTX를 타고 가다 잡지에서 우연히 머구리에 관한 기사를 읽은 게 다큐의 시작이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탈북자 출신인) 박명호씨였던 건 아니다. 잠수병을 앓는 머구리 한 분을 섭외하려 했는데, 치료 기간이 길어져서 출연자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여러 방송과 신문에 났던 명호씨를 알게 되면서 그를 섭외하게 된 거지.”

-처음 출연 제안을 했을 때 박명호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엔 좀 시큰둥했다. 명호씨는 2006년 5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탈북해 강원도 고성군 대진항에서 머구리 작업을 하며 살아왔다. 탈북인으로서 남한 사회에서 느끼는 소외감이나 억울함이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취재했던 TV나 신문에선 그를 ‘성공한 탈북 잠수부’로 묘사할 뿐, 정작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루지 않았지.
그래서 ‘이건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다. 당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 싶다’고 명호씨를 설득해서 마침내 승낙을 얻었다. 이미 명호씨는 미디어를 통해 ‘성공한 탈북자’로 알려졌는데, 사실 네 가족이 생활고 없이 넉넉히 먹고사는 정도다. 이는 역설적으로 탈북자들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올드마린보이'

'올드마린보이'

-박명호가 다큐 주인공으로 흥미로웠던 이유는.
“늘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살고 있어서다. 목숨을 걸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 온 사람(탈북자)이, 이곳에서도 매일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일(머구리)을 하고 있다는 점에 끌렸다.
 나는 명호씨를 종종 ‘설계자’라고 표현한다. 겉으로 보면 호탕하고 단순한 성격인 것 같아도, 속으론 늘 변수를 생각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냉철하고 성실한 인물이다. 가장으로서의 역할, 직업을 대하는 태도, 노후 준비 등 모든 걸 설계한다. 아마 탈북자이기에 더 그렇지 않을까.
다큐 속에서 그는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생존을 위해 투쟁할 때’라고 말한다. 북한 특유의 극단적인 슬로건 같지만, 사실 이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다.
가족을 위해 지옥 같은 바다로 잠수할 때야말로, 그가 스스로를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는 순간이다. 잠수는 곧 그의 ‘인생’이다. 그 부분을 다큐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촬영하느라 어려운 점도 많았을 텐데.
“명호씨가 잠수하는 모습을 수중촬영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나는 아예 잠수를 못했기에, 대신 수중촬영 전문 스태프의 도움을 받았지. 안전과 비용 문제로 하루에 산소 탱크를 세 개만 쓰기로 합의했기에,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촬영해야 했다.
게다가 명호씨의 어선(북한에 있는 그의 고향 이름을 따 ‘청진호’라고 지었다)엔 다섯 명 정도만 탈 수 있었으니, 광각렌즈로 화각을 확보해야 하는 등 제약이 많았지. 게다가 3년간 선글라스도 없이 바다 위에 반사된 태양광을 보다 보니 눈에 백내장이 왔더라. 개봉 후 수술 받을 예정이다.”

'올드마린보이'에 출연한 박명호 가족. (왼쪽부터) 첫째 아들 박철준, 박명호, 아내 김순희, 둘째 아들 박철훈.

'올드마린보이'에 출연한 박명호 가족. (왼쪽부터) 첫째 아들 박철준, 박명호, 아내 김순희, 둘째 아들 박철훈.

-박명호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 역시 다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당연하다. 박명호의 존재 이유는 가족 그 자체니까. 아까 말했듯, 그는 가족의 미래를 설계하는 설계자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게 이 작품의 중요한 축이었다. 용접공이었던 큰 아들 철준은 아버지의 목숨을 책임지는 청진호 선장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받는다. 호주 유학을 준비하는 작은 아들 철훈은 명호씨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동기가 되는 존재고. 아내 김순희씨에겐 횟집을 차려준다. 만일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더라도 가족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닻을 마련한 거지.”

-탈북자를 다룬 작품인 만큼, 남북한 양국의 이념에 관한 박명호의 생각이 드러날 법도 한데, 다큐는 이상할 만큼 그 부분에 관심이 없다. 그저 머구리로서 그가 살아가는 일상을 집요하게 그리고 있다.
“명호씨가 남한 사회와 관련해 말하고 싶어했던 건, 탈북자로서 느꼈던 주변 사람들의 냉랭한 시선이었다.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이곳 사람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얘기지. 사실상 정치나 이념 같은 문제는 이 작품에서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미련 없이 제외했다.”

'올드마린보이'

'올드마린보이'

-제목 ‘올드마린보이’는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박명호의 애틋한 마음을 함축한 듯하다.
“‘이방인’‘마린보이’ 등 완성 전까지 제목이 몇 차례 바뀌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제목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탈북자 그리고 잠수부로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마린보이’ 박명호가 남쪽 바다에서 나이 드는 이야기니까.
어릴적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에서 놀던 소년은 이제 남한 사회에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내가 죽으면 (60kg에 달하는) 잠수복을 입힌 채 북쪽이 보이는 묏자리에 묻어달라’고 아들에게 당부하는 바다 사나이기도 하고.”

-독립 다큐 PD 출신으로서, 최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방송 다큐 촬영 중 교통사고로 숨진 故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일부 방송사와의 계약에서 자신이 기획하고 연출한 작품의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독립 다큐 PD의 처우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는데.
“현재 국내 다큐멘터리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저작권이다. 일부 방송사가 독립 PD들이 제작한 작품의 저작권을 독점한 채,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장하는 세계적 추세에 반하는 현상이지. 촬영 원본까지 회수해 창작자가 2차 저작물조차 만들 수 없도록 봉쇄할 정도다.
창작자의 처우 문제를 넘어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이 오히려 이처럼 시대를 역행하는 방침으로 자국의 다큐 산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다.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오롯이 귀속된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님아’로 다큐 사상 최고 흥행 기록(480만명)을 올렸다. 전작의 흥행이 부담되진 않나.
“당연히 부담이 많이 된다. 흥행 실패가 두렵다기보다, ‘의미 있는’ 스코어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와 제작진을 위해서가 아닌, 많은 관객들이 극장에서 명호씨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개봉 전에 미리 백기를 드는 건 절대 아니다. 흥행이 잘 되서 기뻐할 준비도, 혹 잘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준비도 돼 있다. 대신 관객과 이 작품이 만날 때까지, 감독의 소임과 최선을 다해야겠지.”

-계속 궁금했던 게 하나 있다. ‘님아’에 출연했던 강계열 할머니는 건강히 지내시나.
“여전히 정정하시다. ‘님아’ 개봉 후 흥행 수입 정산이 끝나서 할머니와 故 조병만 할아버지가 마땅히 받으셔야 할 몫을 전달했다. 그 돈으로 예전부터 원하셨던 대로 읍내에 작은 아파트를 얻으셨다. 사시사철 온수가 나오고, 화장실도 편하게 다니실 수 있는 따뜻하고 안락한 곳이다. 당당하게 두 분의 능력으로 마련한 집이지. 노인 대학에도 다니시면서, 때때로 동네 할머니들과 재미나게 화투도 치신다. 건강히 잘 계시니, 걱정 마시라(웃음).”

DMZ영화제와진모영 감독의 특별한 인연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이런 인연도 흔치 않다. 시작은 2013년. 진 감독의 첫 장편 ‘님아’가 제5회 DMZ영화제의 신진 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돼 제작비 1000만원과 투자·배급·홍보를 지원받으면서부터다. ‘님아’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DMZ영화제가 일정 부분 산파 역할을 했던 셈.

노부부의 극진한 사랑과 애틋한 이별을 다룬 이 작품은 2014년 제6회 DMZ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영화제 기간 동안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일찌감치 흥행을 예고했다. 당시 DMZ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님아’는 그해 11월 개봉해, 한국 역대 다큐 개봉작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와 달리, 다큐의 멋진 점은 ‘현실에 발을 디딘 이야기’라는 거다. DMZ영화제를 통해 전 세계 뛰어난 다큐를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건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참 행복한 일이지. ‘올드마린보이’가 이번 DMZ영화제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개막작이 돼 감독으로서 무척 기쁘고 영광이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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