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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 투혼 김희진 “오른팔 못 쓰면 왼팔로 칠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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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지난 7월 그랑프리 대회 카자흐스탄전에서 오른손 공격을 하는 여자 배구대표 김희진(위). 오른팔 통증 탓에 팔에 테이프를 감았다. [연합뉴스]

지난 7월 그랑프리 대회 카자흐스탄전에서 오른손 공격을 하는 여자 배구대표 김희진(위). 오른팔 통증 탓에 팔에 테이프를 감았다. [연합뉴스]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 라이트 공격수 김희진(26·IBK기업은행)은 자신을 ‘혹사의 아이콘’이라고 부른다. 18세에 처음 성인 대표팀에 뽑힌 그는 태극마크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달려갔다. 5일까지 치른 국가대표팀 경기가 139경기. 1년에 평균 17경기를 뛴 셈이다. ‘배구 여제’ 김연경(29·중국 상하이)과 맞먹는다. 김연경은 2005년 성인 대표팀에 처음 선발돼 12년간 176경기를 치렀다. 연평균 14경기다. 국제대회는 프로배구 시즌이 끝난 후, 7~9월에 집중적으로 열려 체력 부담이 크다.

18세 때 태극마크 단 오른쪽 공격수 #1년 평균 17경기 뛰어 ‘혹사 아이콘’ #인대 파열로 팔 제대로 못 펴지만 #대체선수 없어 주사 맞으며 출전 #“넉넉한 지원은 바라지도 않아요 #엔트리라도 다 채워서 나갔으면”

김희진은 대표팀에서 김연경 다음으로 득점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는 국제대회에서 기복을 나타냈다. 지난 7월 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에서는 11경기에서 총 108점(평균 9.8점)을 기록했지만, 8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8경기에서 60점(평균 7.5점)에 그쳤다. 오른쪽 팔꿈치 통증 때문이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희진은 그랑프리 대회에 나가자마자 팔꿈치 이상을 느꼈다. 지난 4일 경기도 용인의 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김희진은 “그랑프리 예선 2차전 불가리아전에서 서브를 넣으려 하는데,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공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픽’ 떨어지는 걸 보며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진통제를 맞으며 계속 경기에 나섰다. 대체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구 엔트리는 14명이지만, 한국은 그랑프리에선 12명, 아시아선수권에선 13명으로 팀을 꾸렸다. 이런 상황에서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는 김연경의 지적이 나왔다. 센터 양효진(28·현대건설)은 아시아선수권 경기 도중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조기 귀국했다. 김희진은 "대표팀 선수치고 안 아픈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희진은 팔꿈치 인대 파열로 팔을 쭉 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체력이 바닥 난 언니들을 보며 대회 끝까지 코트를 지켰다. 지난달 17일 아시아선수권 3~4위 결정전에서 중국을 상대로 김연경(8점)의 두 배인 16점을 기록했다. 김희진은 “올해는 유독 대표팀에서 뛰는 게 힘들었다. 넉넉한 지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엔트리만이라도 다 채워서 선수들 부담을 덜어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나라는 선수단을 1, 2진으로 나눠 대회 경중에 따라 번갈아 출전시킨다. 그래야 1진은 몸 관리를 할 수 있고, 2진은 경험을 쌓아 세대교체가 잘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대표팀 선수 혹사 논란에 결국 홍성진 감독은 지난 5일부터 10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그랜드챔피언스컵 대회에는 김연경, 김희진, 양효진 등을 뺀 1.5군으로 꾸려 출전했다.

홍성진 감독, 김연경, 양효진, 김희진, 김수지 등 여자배구대표팀이 26일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월드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결선라운드 출전을 위해 체코 오스트라바 출국을 앞두고 인천국제공항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인천국제공항=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7.07.26/

홍성진 감독, 김연경, 양효진, 김희진, 김수지 등 여자배구대표팀이 26일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월드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결선라운드 출전을 위해 체코 오스트라바 출국을 앞두고 인천국제공항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인천국제공항=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7.07.26/

김희진이 부상으로 성하지 않은 몸을 던져서까지 태극마크에 애정을 쏟는 건 라이트 포지션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다. 그는 “프로배구에서 라이트 공격수 자리를 거의 대부분 외국인 선수가 맡는다. 이 때문에 어린 선수들부터 라이트 포지션은 맡지 않으려고 한다. 그로 인해 대표팀 라이트 공격수의 전력도 약화되고 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나를 보면서 라이트를 맡으려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희진이 빠진 그랜드챔피언스컵에는 라이트 포지션에 하혜진(21·한국도로공사)이 선발됐다. 그리고 5일 일본과의 대회 1차전에서 20점을 올리며 처음 치른 성인 국제대회에서 활약했다. 김희진의 소망대로 후배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는다면 대표팀 전력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희진 선수가 4일 경기도 용인시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진한 쌍꺼풀에 오똑한 코, 하얀 피부. 이목구비가 뚜렷한 김희진은 눈길을 끄는 미인형이다. 하지만 연습을 더 하기 위해 기초 화장품조차 잘 바르지 않는다. 머리를 관리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소년처럼 짧게 자른다. 배구 팬들은 그런 그를 ‘희진이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자배구대표팀 김희진이 26일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월드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결선라운드 출전을 위해 체코 오스트라바 출국을 앞두고 인천국제공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인천국제공항=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7.07.26/

여자배구대표팀 김희진이 26일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월드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결선라운드 출전을 위해 체코 오스트라바 출국을 앞두고 인천국제공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인천국제공항=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7.07.26/

올해 자유계약선수(FA)가 된 그는 연봉 3억원에 재계약하는 ‘대박’도 터뜨렸다. 3억원은 양효진과 더불어 여자 프로배구 최고액이다. 그런데 여름 내내 대표팀에서 뛰느라 정작 소속팀의 2017~18시즌 준비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얼마 뒤엔 세계선수권 아시아예선전(20~24일·태국) 때문에 또다시 대표팀에 차출된다. 이정철 기업은행 감독과 팀 동료들은 김희진에 대한 걱정이 크다. 그래도 태극마크의 엄중함을 아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른팔을 못 쓰면 왼팔이 있잖아요. 저는 왼팔로도 금방 공을 칠 수 있어요.”

용인=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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