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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트립]을지3가 노가리는 왜 1000원일까···시간 멈춘 노포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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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는 동네? 맛집 거리다. 서울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등은 모두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며 밥 먹고 차 마시고, 또 디저트 즐기는 게 가능한 맛집 동네다. 이런 도심 핫플레이스를 즐길 수 있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푸드트립’, 이번에는 노포가 몰려있는 서울 을지로다.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 

을지로 골목은 낡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어 미로처럼 좁고 복잡하다.하지만 이곳만의 매력이 있다.김경록 기자

을지로 골목은 낡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어 미로처럼 좁고 복잡하다.하지만 이곳만의 매력이 있다.김경록 기자

높아야 3~4층인 낮고 허름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을지로3가역 주변. 낡은 건물들은 바로 옆 을지로2의 세련된 고층 빌딩과 비교돼 더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이곳만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용어조차 낯선 공업용 부품과 기계를 파는 공구상부터 대낮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조명 가게 등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하다.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대 식당도 여럿 생겼다.
하지만 도시 발달에 속도를 맞추지 못한 을지로3가는 재개발 추진마저 여러 번 번복되며 쇠락을 거듭했다.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이곳에 남아 예전의 그 기계를 돌리고 예전의 그 물건을 판다. 시간이 이곳만 비켜갔다는 듯이. 식당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덕분에 값싸고 푸짐한 식당이 5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들 노포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을지로의 문화유산해설사 신성덕(71)씨는 "을지로 노포는 대부분 포장을 하지 않는데 귀찮아서가 아니라 가게에서 먹어야 음식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철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새로 유입되는 사람도 적다. 중구청 시장경제과 이남숙 주무관은 "노포들은 주인이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재개발 추진 번복으로 임대료가 크게 오르지 않아 임대로 들어와도 오래도록 장사를 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중식이냐 냉면이냐

을지로 푸드트립은 점심 시간에 시작해야 한다. 브런치 카페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점심 장사 하는 식당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메뉴가 고민이라면 중식을 추천한다. 동네마다 있는 게 중국집이라지만 을지로는 단연 세월의 깊이부터 다르다. 을지로3가역 큰길에 자리한 '안동장'은 1948년 문을 연 서울 최초의 중국집이다. 지금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순 없지만 대를 이어 온 요리 맛은 그대로다.

을지로3가 중국집은 세월의 깊이부터 다르다. 군만두집으로 유명한 '오구반점'은 1953년 문을 열었다. [사진 중구청]

을지로3가 중국집은 세월의 깊이부터 다르다. 군만두집으로 유명한 '오구반점'은 1953년 문을 열었다. [사진 중구청]

안동장 맞은편 2번 출구 옆 골목에 있는 빨간색 간판의 '오구반점'은 군만두 맛집이다. 53년 문을 열 때 5-9번지라는 번지수 대로 가게 이름을 짓고 아들 이름도 오구로 지었는데 그 아들 왕오구씨가 아버지에 이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동굴같은 입구를 지나야 나오는 '을지면옥'은 1985년 문을 열었다.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와 파를 고명으로 올려낸다. [사진 중구청]

동굴같은 입구를 지나야 나오는 '을지면옥'은 1985년 문을 열었다.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와 파를 고명으로 올려낸다. [사진 중구청]

하지만 역시 을지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냉면이다. 을지로3가역 5번 출구 바로 앞의 '을지냉면'에 가면 맑은 육수에 파와 고춧가루를 올린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다. 동굴 같은 입구를 지나야 가게가 나오는데 식사시간이면 늘 입구를 지나 대로변까지 줄이 길게 늘어선다.

계란 띄운 쌍화차에 다방 커피

을지면옥과 이어지는 코스가 있다. 을지면옥 2층 '을지다방'이다. 을지면옥 오른쪽에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을지다방이 나온다. 50년 동안 주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이름과 내부는 그대로다. 커피와 프리마(크림)를 넣은 다방커피와 달걀을 띄운 쌍화차가 인기다.

낡은 인쇄소 건물 4층의 '호텔수선화'는 디자이너들의 작업 공간이자 카페다. 김경록 기자

낡은 인쇄소 건물 4층의 '호텔수선화'는 디자이너들의 작업 공간이자 카페다. 김경록 기자

2~3년새 새로 문을 연 공간도 있다. 아무리 새로 열었어도 을지로의 오래된 가게들과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동장 뒤쪽 골목의 '호텔수선화'와 을지로3가역 1번 출구 뒷골목 '커피한약방'이 대표적이다. 엘레베이터도 없는 낡은 인쇄소 건물 4층에 있는 호텔수선화는 빈티지한 조명과 낡은 액자가 걸려있다. 한쪽엔 디자이너의 작품이 전시돼 있어 현장에서 구입도 가능하다. 다른 쪽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어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야 한다.

커피한약방은 고가구와 빈티지 소품으로 개화기 한약방처럼꾸몄다. 김경록 기자

커피한약방은 고가구와 빈티지 소품으로 개화기 한약방처럼꾸몄다. 김경록 기자

커피한약방은 연극배우 강윤석씨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나무 간판 옆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이얼식 전화기와 자개장 등 빈티지 가구와 소품으로 꾸며진 카페가 나온다.

노가리가 1000원인 이유

커피가 식상하다고? 그렇다면 을지다방 맞으편 골목으로 가자. 을지로 3가역 4번 출구 안쪽으로 노가리 골목이 나온다. 이곳엔 1980년 이곳에서 가장 먼저 노가리를 구워 판 '을지OB베어'를 필두로 23개의 호프집이 모여있다. 누가 요즘 세상에 대낮부터 술을 먹냐고? 모르시는 말씀. 노가리 골목의 단골들은 "커피보다 낫다"며 맥주를 들이킨다.

을지로의 대표 맛집 골목인 노가리 골목에 있는 '뮌헨호프'. 낮엔 어르신들이, 밤에는 직장인들이 찾아와 하루종일 북적인다. 외국인도 많다. [사진 뮌헨호프]

을지로의 대표 맛집 골목인 노가리 골목에 있는 '뮌헨호프'. 낮엔 어르신들이, 밤에는 직장인들이 찾아와 하루종일 북적인다. 외국인도 많다. [사진 뮌헨호프]

오후 3시 무렵 노가리 골목을 찾았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가게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노가리 골목 가게 대부분 낮 12시면 문을 연다. 이후 꾸준히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오후 6시 이전까진 대부분 60대 이상 어르신이 찾는다. 500cc 생맥주 한 잔에 3000원, 노가리 한 마리를 1000원에 파니 웬만한 커피 전문점에서 쓴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밖에. 정규호 사장은 "노가리 골목 가게들은 모두 2000년도 이후 노가리 가격을 올리지 않고 1000원만 받는다"고 말했다. 가게마다 노가리 굽는 노하우 등 저마다의 비법을 내세워 경쟁하기 때문에 고객입장에선 값싼 가격에 맛있는 안주와 술을 마실 수 있어 일석이조다. 예를 들어 '뮌헨호프'는 당일 오전에 받은 생맥주만 판다. 그래서 하루에 준비한 500cc 맥주 1200잔이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뮌헨호프'의 노가리. 노가리 골목에선 구운 노가리를 한 마리에 1000원에 판다. 송정 기자

'뮌헨호프'의 노가리. 노가리 골목에선 구운 노가리를 한 마리에 1000원에 판다. 송정 기자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처음으로 노가리를 팔기 시작한 '을지OB베어'. 송정 기자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처음으로 노가리를 팔기 시작한 '을지OB베어'. 송정 기자

노가리 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넥타이 부대가 자리를 채운다. 가게 앞 노상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와 고소한 노가리를 먹으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노포의 성지

3호선 을지로3가역 사거리. 해가 지기 시작하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청계천 방향으로 향한다. 송정 기자

3호선 을지로3가역 사거리. 해가 지기 시작하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청계천 방향으로 향한다. 송정 기자

해가 저물면 직장인들이 한 방향을 향해 걷는다. 바로 3호선 을지로3가역 사거리다. 넥타이 부대는 6번 출구 앞에 있는 양대창 전문점 '양미옥'을 지나 골목길로 하나 둘 사라진다.
이들을 따라갔다. 양미옥을 지나 청계천쪽으로 60m 정도 걸어가니 좁은 골목이 나왔다. 이곳부터 'ㄷ'자로 이어진 좁은 골목이 노포의 성지다. 대부분 60년대 이전에 문을 열었으니 역사가 50년이 넘는다.

을지로3가역 5번 출구쪽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야외에서 고기굽는 사람들이 보인다. 암소등심 한 가지 메뉴만 파는 '통일집'이다. 통일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입구. 송정 기자

을지로3가역 5번 출구쪽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야외에서 고기굽는 사람들이 보인다. 암소등심 한 가지 메뉴만 파는 '통일집'이다. 통일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입구. 송정 기자

골목에 들어서니 노상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굽는 사람들이 보인다. 1969년 문을 연 '통일집'으로, 암소등심 한 가지 메뉴만 판다. 오후 6시 30분이면 이미 테이블이 꽉 채워질 정도로 인기다. 통일집을 지나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생태탕 맛집으로 유명한 '세진식당'이 나온다. 세진식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돼지갈비집 '안성집'과 곱창전문점 '우일집', 소갈비집 '조선옥'이 차례대로 자리하고 있다.

골뱅이냐 막걸리냐

을지로3가역 11·12번 출구가 마주한 골목은 골뱅이무침을 파는 식당이 모여있는 골뱅이 골목이다. 60년대 말부터 골뱅이 파는 가게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현재 영락·덕원·풍납·우진 등 10여 개가 영업중이다. 오후 8시면 어느곳 하나 빈 자리가 없다. 이 골목의 골뱅이 무침은 흔히 생각하는 새콤달콤한 맛이 아니다. 국내산 통조림 골뱅이 하나를 통째로 따서 마늘과 고춧가루, 대구포(또는 아구포), 파채를 함께 낸다. 마늘의 알싸한 향과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모든 가게에선 골뱅이를 시키면 서비스로 두툼한 달걀말이를 함께 준다. 골뱅이무침의 매운 맛을 중화시켜줄 뿐 아니라 허기도 달래준다.

을지로 '원조녹두'에서 여든 넘은 주인 할머니가 그날 사용할 쪽파를 손질하고 있다. 송정 기자

을지로 '원조녹두'에서 여든 넘은 주인 할머니가 그날 사용할 쪽파를 손질하고 있다. 송정 기자

만약 막걸리를 좋아한다면 노가리 골목에서 2호선 을지로3가역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추천한다.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메뉴를 파는 식당 두 곳이 있다. 직접 말린 코다리로 만든 코다리찜을 파는 30년 된 '우화식당', 그리고 여든 넘은 할머니가 파와 해물을 가득 넣고 구워낸 해물파전과 넙쩍한 동그랑땡을 파는 '원조녹두'다. 둘다 오후 7시 이전에 가야 자리잡고 앉을 수 있다.

골목 자체로 매력적 

을지로3가의 매력은 골목에 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해 지도만 보고 찾아가기 어렵다. 만약 을지로를 처음 찾는다면 헤매기 딱 좋다. 이때 이용하면 좋은 게 '을지유람'이다. 전화(02-3396-5085)로 최소 4일 전에 신청하면 문화유산해설사가 현장에서 함께 걸으며 을지로의 역사와 노포를 소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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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역사 50년 노포, 값은 저렴 양은 푸짐 #중국집·냉면집·고깃집 등 다양 #새로 연 곳도 을지로만의 분위기 자아내 #해설사 소개받는 '을지유람' 해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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