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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고통스러울 때 관객 즐거워 … 10㎏ 감량했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설경구는 “나이들수록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묻어난다는 생각이 든다”며 “옛날엔 단순히 살을찌우거나 빼면 된다고 여겼는데, 이젠 그 세월의 흔적까지 나타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쇼박스]

설경구는 “나이들수록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묻어난다는 생각이 든다”며 “옛날엔 단순히 살을찌우거나 빼면 된다고 여겼는데, 이젠 그 세월의 흔적까지 나타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쇼박스]

믿고 보는 검증된 연기파이자 매번 예상을 깨는 변신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배우. 설경구(50)를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배역에 따라 30kg 가까이 체중을 늘였다 줄이는 고무줄 몸무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얼굴 중 가장 건조하면서도 섬뜩한 모습을 선보인다. 7일 개봉하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원작·원신연 감독)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마 얘기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촬영 전 2시간 줄넘기하며 살 빼 #분장 않고 연쇄살인 노인역 맡아 #“알츠하이머 경험자 증언 못 들어 #다큐 보고 실제라 생각하며 찍어”

그가 맡은 김병수 역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이자 17년 전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특수분장도 없이 10kg 체중감량과 기름기를 걷어낸 표정으로 노인의 얼굴을 빚어냈다. 덕분에 영화 시작과 동시에 하얗게 센 머리와 경미한 안면 경련을 일으키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몰입하게 된다. 시사회에서도 “진짜 설경구 맞아”라는 감탄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30일 서울 팔판동에서 만난 설경구는 “노인 분장을 안 해봤으면 모를까 불과 몇 년 전에 했던 걸 또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나의 독재자’(2014)에서 매일 5시간의 특수분장을 통해 70세의 김일성 대역을 연기하고, 18kg을 감량한 ‘오아시스’(2002)부터 28kg을 찌운 ‘역도산’(2004)까지 몸 만들기에는 이력이 난 그답게 “이번엔 한 번 늙어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다.

그는 매일 촬영 직전 2시간씩 줄넘기를 하고 탄수화물은 물론 수분까지 조절하면서 병수가 되어갔다. “‘오아시스’ 이후 꾸준히 줄넘기를 한다”는 그는 “날씨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좁은 방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고, 오늘 아침에도 하고 나왔다. 칸이나 베니스 영화제 갈 때도 줄넘기를 챙겨간다”며 줄넘기 예찬론을 펼쳤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에 그려진 병수의 모습이었다.

지난달 28일 ‘살인자의 기억법’기자간담회에서설현(오른쪽)과 이야기 하는 설경구.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살인자의 기억법’기자간담회에서설현(오른쪽)과 이야기 하는 설경구. [연합뉴스]

“원래는 원작을 읽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 너무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단숨에 다 읽었는데 감독은 병수를 50대 후반으로 설정했더라고요. 하지만 요즘 50대는 청년이잖아요. 그래서 최소 60세 이상으로는 보여야겠다 싶었죠. 쾌감을 위해 살인을 하는 원작의 캐릭터와 죽어 마땅한 사람을 청소한다는 명분으로 살인을 하는 영화 속 캐릭터는 전혀 다른 사람에 가까웠지만 상통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다른 하나는 치열함에 대한 회복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송강호와 누적관객 수 1, 2위를 다투던 그는 ‘공공의 적 2013’ 이후 이렇다할 흥행작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는 “오달수씨가 배우가 더 고민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 관객은 더 즐거워하고 입체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아차 싶었다”며 “한동안 별다른 고민없이 작품에 임했는데 고민에 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밝혔다. 공허함과 매너리즘에 휩싸였을 때 만난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큰 산을 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딸 은희(설현 분), 경찰 민태주(김남길 분), 안형사(오달수 분) 등 주요 등장 인물은 원작을 모티브로 영화 속에서 재창조된 캐릭터들이다. 설경구는 이들 모두를 능숙하게 한 점으로 모은다. 일기 형태의 내레이션은 설경구 특유의 저음과 맞물려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

설경구는 “알츠하이머를 실제로 겪은 사람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로 다큐멘터리 등을 참고해 모든 장면을 실제라고 생각하고 찍었다”며 “결말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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