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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피해 숨어지낸 골방, 그곳이 루터의 광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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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종교개혁 500년-현장을 가다 <하>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지금은 철문에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지금은 철문에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마르틴 루터는 고민했다. 고해성사를 하는 이들이 갈수록 줄었다. 이유를 알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면죄부(면벌부) 때문이었다. 루터가 살던 시골 도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면죄부를 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웃 도시까지 가서 면죄부를 구입해 왔다. 그들은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 면죄부를 가졌으니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면제받았다고 여겼다.

면죄부 파는 교회 겨눈 ‘95개 논제’ #사본 수천 부가 유럽 전역에 퍼져 #결국 파문 … 작센 제후 성에 은신 #독일어로 성경 번역, 50만 부 팔려

루터는 당시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면죄부 판매 수익은 교황청이 로마의 베드로성당 건축비로 사용했다. 아니면 대주교가 되기 위한 고위 성직자의 뇌물 자금 등으로 쓰였다. 루터는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부터 교회를 엎어버릴 생각이 아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신학적으로 토론이나 한번 해보자”며 손을 들었다.

나는 비텐베르크로 갔다. 그곳에 루터가 살았던 성당이 있었다. 루터 당시에는 함께 토론하고 논쟁할 거리가 있으면 교회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 그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읽고서 즉석에서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도 성당의 정문에 라틴어로 ‘대자보’를 붙였다. 이른바 ‘95개 논제’였다. 그날이 ‘종교개혁 500주년’의 기점이 되는 날이다.

비텐베르크 교회의 내부. 앞에 꽃다발이 놓인 곳이 마르틴 루터의 묘이다.

비텐베르크 교회의 내부. 앞에 꽃다발이 놓인 곳이 마르틴 루터의 묘이다.

나는 ‘95개 논제’를 일일이 읽어보았다. 수도원에서 15년간 생활하며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하느님(하나님)’에 절망하던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꼭대기 탑방의 화장실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주창했다. 루터는 그 눈을 갖고서 95가지 물음을 던졌다.

‘95개 논제’를 읽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겨눈 것처럼 루터의 창은 매섭고, 또 날카로웠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부자보다 더 부유한 교황이 왜 자신의 돈으로 거룩한 베드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훨씬 더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평화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십자가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바르트부르크 성의 골방에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의 골방에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5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날 교회에도 ‘말로 하는 평화, 말로 만든 십자가’가 넘친다. 중세 때만 교회 건축으로 승부를 걸었던 게 아니다. 지금도 일부 목회자는 영성의 갈무리 대신 교회의 건물을 올리며 승부수를 던진다. 신축 과정에서는 예산 집행의 투명성 등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전’이라며 집행된다.

어쩌면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안에 도사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반 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면죄부’를 갈망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 ‘천국행 티켓’을 구매하고 싶어한다. 이런 욕망을 과연 중세의 교회만 이용했을까. 요즘도 적지 않은 교회가 자기 십자가를 생략한 채 공짜 구원만 강조하며 ‘현대식 면죄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교황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 포도밭 짓밟아”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그들은 진리를 향한 밤길을 일러주는 별이었다.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그들은 진리를 향한 밤길을 일러주는 별이었다.

비텐베르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설교단 아래 루터의 묘가 있었다. 거기에 루터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루터의 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묘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루터의 ‘95개 논제’는 순식간에 퍼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덕분이었다. 수천 부의 사본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 독일 시골 도시의 보잘 것 없는 사제 교수가 써붙인 종이 한 장이 ‘중세의 뇌관’이 됐다. 대자보를 써붙인 지 3년 후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에게 교서를 발송했다. 일종의 ‘파문 경고장’이었다. 교황은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밭을 짓밟고 다닌다”며 루터의 저술을 불태우게 했다. 그리고 41개 항의 오류를 지적하며 60일 안에 ‘95개 논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맞받아쳤다. 교황의 교서를 참나무 아래서 태워버렸다. 공개적인 장소였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그건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순간이었다. 나는 비텐베르크 입구의 그 참나무를 찾아 갔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루터의 참나무’라고 불렀다. ‘저 나무는 보았겠지. 교황의 교서를 태우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던 루터의 심정을 말이다.’

예수 이전의 구약 시대에도 제사장이 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족만 성막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양을 키우지도 않고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제물을 받는 특권층이 됐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 제사장 그룹은 그랬다. 중세 유럽에선 가톨릭 성직자들이 그랬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만 말씀을 듣고, 기도를 했다. 종교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계급’이었다. 그런 시대에 루터는 혁명적 주장을 했다. 이른바 ‘만인 제사장론’이다. 나와 예수,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징검다리도 필요 없다고 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신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너도 제사장이고, 나도 제사장이다. 그렇게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했다. 그게 루터의 정신이다. 그럼 오늘날은 어떨까. 성직자와 평신도, 그 사이에 아무런 문턱이 없을까. 행여 오늘날의 목회자가 그 옛날의 제사장이 돼 있는 건 아닐까.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했다.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루터는 고민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루터는 결국 보름스로 갔다.

나는 버스를 타고 보름스로 갔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사이의 도시였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는 500㎞였다. 제국의회는 루터에게 ‘철회’를 요구했다. 루터는 당당했다. 황제와 제후와 추기경들 앞에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다. 저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어떠한 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양심에 반해 행동하는 건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다”라고 일갈했다.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자 루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작센의 제후였던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숨겨 주었다. 루터는 산악지대인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지냈다. 수염을 기른 채 기사 신분으로 위장했다.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10개월간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수녀원 탈출한 카타리나와 결혼, 평생 동지로

멜란히톤은 루터의절친한 친구이자종교개혁 동지였다.비텐베르크에는멜란히톤의 묘도 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절친한 친구이자종교개혁 동지였다.비텐베르크에는멜란히톤의 묘도 있다.

나는 아이제나흐로 갔다. 버스로 10분 정도 산길을 올랐다. 울창한 산 속에 바르트부르크 성이 나타났다. 웅장했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루터가 지냈던 골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썼던 책상과 의자, 벽난로도 있었다. 벽에는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여윈 얼굴에 수염을 기른 루터. 그의 눈빛에서 ‘양심을 향안 의지,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읽혔다.

루터는 이곳에서 편지도 썼다. 편지 말미에는 ‘광야에서’ 또는 ‘밧모 섬에서’라고 적었다. 광야는 예수가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던 곳이다. 에게해의 밧모 섬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던 감옥이다. 그러니 이 성의 골방이 루터에게는 감옥이자, 광야이자, 신의 음성을 듣는 곳이었다. 당시 루터는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했다. 1534년에 출간된 루터의 신·구약 독일어 성경은 무려 50만 부 넘게 팔렸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성에서 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수녀원에서 탈출한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사제 출신과 수녀 출신의 만남, 둘은 종교개혁의 동지였다. 루터에게도 오점은 있었다. 1525년 독일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루터는 무력진압을 강하게 주장했다. 무려 10만 명의 농부들이 학살됐지만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섰다. 봉건적 시대 상황과 얽힌 루터의 한계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며 생각했다. 종교는 늘 개혁을 요구한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루터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왜 그럴까. ‘종교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명분이 되고, 수단이 된다. 버스 창 밖으로 날이 저물었다. 순례의 마지막에 나는 루터의 어록을 묵상했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온다.”

그러니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

비텐베르크(독일)=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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