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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염문설 뿌렸던 故다이애나, 진정한 사랑은 ‘이 남자’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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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유치원 보모였던 다이애나 스펜서. 1981년 13살 연상인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그녀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현대판 신데렐라’로 불려온 그녀가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건 왕세자빈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디가드, 심장전문의, 영국군 대위, 아랍계 부호까지 다양 #'마지막 연인'이었던 알 파예드는 교통사고로 함께 사망 #"진정한 사랑은 찰스 한 명이었다"는 전직 경호원 주장 #다이애나 연애사, 책·영화로 재탄생

바로 끊임없는 염문설이었다. 윌리엄·해리 왕자를 출산하고, 찰스와 별거해 그와 공식 이혼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스캔들은 꾸준히 언론에 오르내렸다.

보디가드, 심장전문의, 영국군 대위부터 아랍계 부호까지 '다이애나의 남자들'은 신분도 배경도 다양했다. 엄격함과 자제가 요구되는 왕세자빈의 생활과 밀애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섰던 다이애나. 그녀의 남자들을 살펴봤다.

도디 알 파예드 

다이내아 사망 1주기를 맞아 다이애나 추모 분수 앞에 놓인 그녀와 연인 도디 알 파예드의 사진. [중앙포토]

다이내아 사망 1주기를 맞아 다이애나 추모 분수 앞에 놓인 그녀와 연인 도디 알 파예드의 사진. [중앙포토]

영국 런던의 헤롯 백화점 등을 소유한 이집트 재벌 2세였던 알 파예드. 그는 97년 8월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당시 그녀의 옆자리에서 함께 숨졌다.

교통사고 전날 저녁 도디 알파예드와 다이애나가 함께 호텔 로비를 걸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교통사고 전날 저녁 도디 알파예드와 다이애나가 함께 호텔 로비를 걸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사고 발생 며칠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지중해의 요트 위에서 한가로운 일상을 보냈다. 수영복 차림으로 카메라에 포착된 다이애나의 사진은 타블로이드 신문에 게재됐다. 평소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그녀는 요트에서의 일상을 기자들에게 미리 귀띔했다고 한다. 옛 연인 하스나트 칸이 이 사진을 보길 원했다고 한다.

하스나트 칸 

연애하던 시절의 하스나트 칸과 다이애나. [중앙포토]

연애하던 시절의 하스나트 칸과 다이애나. [중앙포토]

찰스와 공식 이혼 1년 전인 95년, 다이애나는 지인의 문병을 갔다 무슬림계 의사인 칸을 우연히 만났다. 자신을 프린세스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대하는 칸의 태도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그의 직업에 흠뻑 매료됐다고 한다. 다이애나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웠던 칸은 처음엔 그녀의 구애를 거절했지만,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발까지 쓰고 나오는 그녀의 열정에 끝내 마음을 열었다.

최근 영국의 이스트 런던에서 촬영된 하스나트 칸. [중앙포토]

최근 영국의 이스트 런던에서 촬영된 하스나트 칸. [중앙포토]

그러나 칸의 어머니는 비무슬림 여성을 며느리로 맞는 걸 반대했고, 칸 스스로도 다이애나로 치르는 유명세에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만남 2년만인 97년 두 사람은 이별했다.

바리 매나키 

다이애나를 경호하며 가까워진 바리 매나키.[중앙포토]

다이애나를 경호하며 가까워진 바리 매나키.[중앙포토]

다이애나의 보디가드로 뛰어난 경호기술을 갖췄던 매나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호위하며 비밀을 나눌 정도로 다이애나와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들킨 뒤 매나키는 켄싱턴궁에서 쫓겨났고, 이듬해인 87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다이애나(오른쪽)가 탄 차량을 운전 중이던 바리 매나키. [중앙포토]

다이애나(오른쪽)가 탄 차량을 운전 중이던 바리 매나키. [중앙포토]

매나키의 죽음 이후 다이애나는 그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확인되지 않은’ 보안 요원과 깊은 사랑에 빠졌고, 왕세자빈 신분을 포기해서라도 그와 왕실을 떠나 함께 살고 싶었다”는 간접적 증언을 했었다.

제임스 휴잇 

승마 교관으로 일할 때 다이애나와 만난 제임스 휴잇 전 영국군 대위(왼쪽)와 다이애나. [중앙포토]

승마 교관으로 일할 때 다이애나와 만난 제임스 휴잇 전 영국군 대위(왼쪽)와 다이애나. [중앙포토]

86년 두 아이의 엄마였던 다이애나는 승마 교관이었던 영국군 출신 제임스 휴잇과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86년부터 91년까지 이어졌다. 찰스는 지금의 아내인 카밀라(콘월 공작부인)와 공개 연애를 즐기는 등 당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안한 조짐을 보이던 때였다.

둘의 관계가 밝혀진 건 94년 휴잇이 “우리는 아주 깊은 관계였다”고 실토하고, 이듬해 다이애나마저 과거 그와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다. 영국 왕실은 발칵 뒤집혔다. 왕세자빈으로 착실히 쌓아놓은 다이애나의 이미지도 흠이 갔다.

다이애나의 차남인 영국 해리 왕자(왼쪽)와 제임스 휴잇 전 영국군 대위. 한땐 해리가 휴잇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중앙포토]

다이애나의 차남인 영국 해리 왕자(왼쪽)와 제임스 휴잇 전 영국군 대위. 한땐 해리가 휴잇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중앙포토]

설상가상으로 ‘휴잇이 해리 왕자의 아버지’란 소문도 돌았다. 해리가 휴잇처럼 머리가 붉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혼외설을 비롯해 추측성 보도가 잇따랐고, 다이애나 사망(97년) 5년 뒤인 2002년이 돼서야 휴잇은 “다이애나가 해리를 낳은 건 나를 만나기 전”이라고 해명했다. 이듬해 그는 생전 다이애나로부터 받은 편지 64통을 1000만 파운드(145억원)에 팔려고 내놨다가 “신뢰를 저버렸다”는 맹비난을 받았다.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는 18살 때 찰스를 처음 만났다. “한 장례식에 참석한 당신의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누군가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았다”며 감정을 표현한 다이애나와 찰스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이는 ‘세기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카밀라와 찰스의 불륜이 이혼의 단초로 작용했지만, 애당초 두 사람은 맞지 않았다고 한다. ‘나눌 만한 관심사가 부족했다’(a complete lack of shared interests)는 현지 분석도 꽤 있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이던 찰스는 철학 책을 읽거나 한적한 교외로 나가 산책하는 걸 좋아했다. 활발한 성향의 다이애나는 팝 밴드 듀란듀란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1981년 '세기의 결혼식'에서 입맞춤을 하던 다이애나와 찰스. [중앙포토]

1981년 '세기의 결혼식'에서 입맞춤을 하던 다이애나와 찰스. [중앙포토]

다이애나가 진정 사랑한 남자는 찰스 한 사람이었단 증언도 최근 나왔다.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에 대한 충격과 이에 따른 반발심으로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웠다는 것이다. 매나키의 죽음 뒤 그녀를 6년(87~93년)간 호위했던 켄 와프는 지난 17일(현지시간) 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찰스의 질투심을 일으키고자 휴잇 대위와 만났을 뿐”이라며 “비서인 매나키와는 단 한 차례의 성관계도 갖지 않았다. 그는 왕실 내에서 다이애나가 기대 울 수 있는 한 사람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미술품 거래상, 럭비 선수와도 연애를 즐겼던 다이애나의 연애사(史)는 종종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됐다. 휴잇과의 만남은 책 『사랑에 빠진 왕세자비』(94년)로, 칸과의 만남은 영화 ‘다이애나’(2013)로 만들어졌다.

수많은 염문설을 뿌린 채 요절한 다이애나. 불꽃처럼 타들다 홀연히 떠난 그녀에게 혹자는 ‘만인의 연인이지만 누구로부터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 했다’는 씁쓸한 뒷말을 남겼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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