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전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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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음악, 그 중에서도 고전음악 감상의 즐거움은 인간성의 저 깊은 곳을 따뜻하게 자극받는 데 있다. 온갖 시각정보를 받아내느라 지칠대로 지친 눈은 편안하게 감겨둔다. 두 귀와 청각신경, 감성을 관장하는 오른쪽 뇌를 '춤추는 소리들'을 흡수하는 데만 집중시켜 본다.

장엄하거나 감미롭거나 서사적인 음(音)의 청신한 기운이 한두시간 인간성의 내면을 휩쓸고 지나가면 영혼은 맑아지고, 세상을 보는 눈은 밝아진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가 지난주 독일의 '바그너 음악제'에 슈뢰더 독일 총리와 함께 참석해 다섯시간 동안 오페라를 감상했다고 한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유럽인들은 일본 총리의 이런 음악외교를 기분좋게 바라봤을 것이다.

이혼한 지 20년째, 독신의 자유로운 생활에 젖은 올해 예순살 된 고이즈미 총리의 취미는 여름엔 캠핑, 겨울엔 스키다. 매일매일의 고전음악 감상은 그가 제일로 치는 취미다.

절대적 자유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의원 시절 고이즈미는 클래식 콘서트에 수행비서 없이 혼자 참석하곤 해 행방불명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오케스트라 특별활동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중학생 시절부터 고이즈미가 모아온 클래식 음반은 2천장이 넘는다. 그는 특히 바그너(1813~83) 음악에 심취해 있다.

그러고 보면 바그너와 고이즈미 사이엔 1백30년의 시대와 양(洋)의 동서, 예술가와 정치인이라는 차이를 넘어서 공통된 정신의 내재율이 흐르는 것 같다.

우선 바그너는 노래를 중시하는 이탈리아식 정통 오페라 형식을 파괴했다. 대신 극적인 구조와 이야기의 흐름, 이를 음악적으로 뒷받침하는 '무한선율'이란 기법을 동원해 바그너식 오페라를 확립했다. 바그너는 형식의 파괴자이자 창조자였던 것이다.

음악의 내용 면에서,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탄호이저'같은 중세 독일지역의 전설을 장엄한 오페라로 승화시킴으로써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에 자부심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그 스스로 근대 공화주의 민족국가 건설에 참여한 열렬한 혁명가였다. 이런 점이 기존정치 관행의 혁파, 신사참배 같은 짙은 우익성, 정열적인 국민 선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고이즈미의 정신적 주파수와 맞아 떨어지는 대목들이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