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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과 타협 넘어 더 높고 넓은 이상 세울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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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2면

[빠른 삶, 느린 생각] 윤리가 먼저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아직도 북한의 핵전쟁 위협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 며칠 사이의 사태 진전으로 보아 그 위험도는 조금은 사그라든 것이 아닌가 한다. 외신 보도는 머리 위에 핵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나날의 삶을 태연하게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영위한다고 하여 기이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무감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깊은 의미에서 속수무책이라는 절망감을 표현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말하여, 북한이 괌을 폭격할 준비가 되어 있고, 폭격 명령만을 기다리는 듯하던 것이 이 시점에서는 조금 주춤해진 듯하다. 그리하여 북의 핵전쟁 계획도 다른 사정에 상관없이 추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하여튼 북의 계획과 시행 사이에 간극이 생긴 것은 사실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엄포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평화적 해결이 막중한 일이지만, 무력 대응의 각오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남북 공멸 부를 전쟁 막는 건 당연 #미래 개척할 진정한 평화 모색해야 #구체제 타도하려는 적폐 청산보다 #조화와 평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그러면서도 평화적 해결이 지상명령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도된 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에 언급하면서, 평화를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의 핵전쟁은 이기고 지는 일과 관계없이 전쟁 당사자 국가를, 우리의 경우 남북을 가리지 않고 민족 전체를, 절멸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의 문 대통령의 연설에는 ‘남북의 평화로운 관계가 남북이 민족의 밝은 미래를 함께 개척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희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전쟁을 피한다는 것 이상의 더욱 긍정적인 남북관계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평화는 그 자체로 삶의 조건이며 목표

평화는 그 자체로 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면서 사람이 이룩해내야 할 더 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기도 한다. 예로부터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 노력의 종착점이었다 (『대학(大學)』). 개인적으로도 평안(平安)은 일상적 안녕의 기본이다. 화(和)와 관련해서는, 화기(和氣), 화기애애(和氣靄靄)란 말도 있다. ‘화기는 그대로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옛말은 화기 자체가 적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예기(禮記)』, 유화기자필유유야(有和氣者必有愉也).

북핵 위협의 위태로움은 화전양면의 현실 대책을 요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를 넘어가는 적극적인 평화의 이상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그보다는 급한 일에 부딪쳤을 때의 사고에서 힘의 대결과 타협 그리고 더 높고 넓은 이상이라는 삼중의 구조가 필수적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국내 정치를 생각함에도 작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는 지나치게 힘과 전술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회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와 사회는 힘의 균형관계 속에 성립하고 유지되는 통합체이다. 사회내부에서 힘은 개인의 힘이기도 하고, 이해와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힘이기도 하다. 집단의 결속은 그 자체로, 또는 다른 집단에 대한 대항 의식으로 하여 삶의 정열을 고양한다. 그러면서도 기대하는 것은 이 힘들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 나름의 집단 의식과 윤리 의식을 조성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반드시 사회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윤리 의식에 이르지는 아니한다. 세속화된 세계에서 이것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한국은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강한 윤리 이념에 입각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쉼 없는 이념 갈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근대화는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윤리적 공동의식이 없이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성립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윤리는 인간적 가능성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다.

지난 몇 십 년의 한국의 역사는, 자주 지적되듯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과제는 그것을 더욱 인간적인 조화 속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당위의 하나가, 지금의 시점에서는, 인간적 삶을 위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이다. 의료, 교육, 소득 격차의 축소, 그리고 다른 복지 정책은 근년의 정치 프로그램이 되어 왔었다. 문재인 정부는 특히 이 사회정책에 역점을 두고 그것을 확대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이 충분한 것인가, 또 현실적인 원인과의 관련들을 숙의하고 고려한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의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이 이는 것은 사회정책의 문제들을 윤리적 사명감 속에 통섭하지 못한 것에도 관계된다.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는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삶의 필요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필요를 넘어 사회적 재화와 소득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요구에서 나온다. 어느 쪽이 동기가 되든지, 흔히 평등의 요구에 크게 작용하는 것은 분노이다. 분노는 흥분과 해방의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 투쟁의 공간에서 현실적 힘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만으로써 참으로 높은 인간성 실현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더욱 철저한 화해이고, 더 나아가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것이다.

인간의 평등함은 불평등한 당사자의 주장으로서만 보편적 인간 현실이 되지 아니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공감과 동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편적 인간됨에 대한 의식에 의하여 인간 현실의 한 부분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지 아니할 때, 그 잘못은 이 타자의 의식 속에서 도덕적 가책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한 의식은 윤리 의식의 일부로 존재한다. 윤리 의식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이 일반화된다면, 평등은 거세게 주장될 필요가 없다. 물론 많은 경우 더 보편적인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촉진하는 것은 문제들의 의식화,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다. 그 실천의 깊은 바탕이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윤리 의식이다. 그러나 모든 정책 대안에 윤리 의식의 환기(喚起)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윤리는 인간의 사고와 충동을 통괄하는 매체로 존재한다. 정부의 정책적 관심이 사회적 윤리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것은 저절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서로 조심하고 존중하는 윤리 의식 필요

현 정부가 유행하게 만든 말 하나가 적폐청산이다. 국가 기관을 포함하여 모든 공공 기관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때, 그것이 정당하여야 하고 그 정당성을 투명하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공적 의무의 수행은 쉽게 타성에 젖고, 현실과 괴리되고 또 부패한다. 여기에 쌓이는 폐단들은 되풀이하여 청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폐라는 용어의 함의는 모호하다. 그것은 정확하게 지적되지 않는 많은 것, 마땅치 않는 전체를 포괄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를 전체적으로 적대화하는 함의를 갖는다. 체제 전체를 타도 전복하여야 한다는 사고, 즉 혁명의 정치 사상의 습관을 시사한다. 사실 우리 정치에서 혁명이라는 말은 낭만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에너지를 쉽게 동원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이 우리의 상황과 과제를 바르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쳐야 할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세상을 뒤바꾸는 일이 아니라, 가려야 할 사항들은 있겠지만, 그간 이룩된 것을 더 높은 새로운 단계로, 조화와 평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세계행복보고서’가 발표된 바 있었다. 영국의 BBC 인터넷 판은 이것을 기대 수명을 지표로 하여 보도하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일본·싱가포르·스페인, 그리고 한국의 네 개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나라라고 한다. 수명이 길어지는 데에는 경제와 정치의 발전이 중요하겠지만, 이 보도는 그 요인으로서 장수 국가의 사회적 특성을 지적한다. 한국의 경우, 사회적 특성으로서 유대 의식을 거론하고 또 영어로 표현하여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든다. 마인드풀니스는 배려하고 조심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흔히 동양고전을 번역할 때 ‘경(敬)’을 번역하는 말로 쓰인다. ‘세계행복보고서’는 윤리를 인간적 행복의 중요한 동인으로 본다. 그리하여 경, 즉 인간사 모두에서 조심하고 존중하는 윤리 의식을 한국사회에서의 장수와 행복의 요인으로 본 것이다. 이제 한국이 거경(居敬)하는 사회, 경에 머무는 사회가 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까?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심미적 이성의 탐구』『자유와 인간적인 삶』『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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