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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북한의 꼭두각시가 된 트럼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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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진 H 리 전 AP통신 평양특파원

진 H 리 전 AP통신 평양특파원

북한 주민들은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적수 미국을 상대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자부심을 느낀다. 평양 정권이 한국전쟁 정전일인 1953년 7월 27일을 ‘승리의 날’로 경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트럼프의 노골적인 대북 위협 #김정은의 핵 개발에 좋은 핑계 #북한 주민 대미 적개심도 키워 #위협 대신 협상이 현명한 선택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다. 군사적 해결책이 준비됐고 장전됐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두려움에 벌벌 떨 것으로 여기고 이 말을 했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평양 정권은 자신들의 선전·선동에 제대로 장단을 맞춰 준 미국 대통령을 보며 기쁨에 들떴을 것이다. 작은 고슴도치인 북한이 호랑이를 싸움판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국 방방곡곡에 반미 선전물이 넘쳐난다. “사악한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려 하지만 친애하는 김정은 동지가 핵무기를 개발했으니 안심하라”는 게 골자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김정은은 오로지 ‘미제의 위협’을 핑계로 핵 개발에 전념해 왔다. 그런데 때마침 새로 집권한 미국 대통령이 ‘전쟁 불사’ 운운하며 북한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김정은에겐 핵 개발을 정당화할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북한 아이들은 걷기 시작할 나이가 되면 미국을 적으로 보는 교육을 받는다. 내가 방문했던 평양의 한 유치원에는 반미교육을 위한 방이 2개나 마련돼 있었다. 첫 번째 방에는 북한 소년들을 나무에 묶고 고문하는 미국 선교사, 소녀들을 향해 들개를 푸는 매부리코 모양의 미군 그림이 붙어 있었다. 두 번째 방은 아이들이 장난감 총칼로 미군을 찌르는 연습을 하는 곳이었다, 다섯 살배기들에게 이런 교육을 하다니 충격이었지만 효과는 분명 있었다. 김정은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반미 박물관’을 조성하기도 했다. 핏빛 가득한 실물 사이즈 모형으로 미국의 전쟁범죄를 묘사한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그 내용이 선명히 각인된다.

광기에는 체계가 있다. 김정은은 미국의 위협을 이용해 북한 주민의 복종을 끌어내고 있다. 정권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데 외부의 적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트럼프가 노골적인 외국인 혐오 선동으로 지지층을 확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외세의 위협을 강조하는 선전·선동은 특히 한국인에게 위력을 발휘한다. 수천 년간 한국은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인들이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건 국가적 전통이었다. 한국이 ‘은자의 왕국’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정은은 2011년 세습을 통해 지도자가 됐다. 3대 권력 세습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불만도 고조됐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과 평양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고슴도치의 가시에 해당하는 핵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들은 “우리에게 핵무기라는 ‘보검’만 있다면 승냥이 같은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킬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이런 스토리텔링을 통해 김정은 정권은 매일 수백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국가 예산의 20% 넘는 금액을 핵무기 개발에 쏟아붓는 모순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제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우리의 안보가 튼튼해지는 만큼 시련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넘어간다. 트럼프의 막말은 북한 주민들에게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부추기고 김정은에게 핵 개발을 계속할 근거를 추가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이 트럼프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해리 트루먼 이후 북한의 반미 캠페인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맞받아친 미국 대통령은 없다. 북한도 미국과 전쟁하면 끝장인 건 안다. 한반도 코앞에 항공모함을 보내고 ‘죽음의 백조’(B-1 폭격기)를 날려 북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나라가 미국 아닌가.

그러나 핵무기만 있다면 북한은 자신이 무적이라 여길 수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위협에 맞서 “괌에 미사일을 쏠지 모른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도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이어 가며 기술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트럼프가 할 일은 하나다. 막말 위협을 중단하고 물러서 김정은에게 핵 개발 핑계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트럼프도 김정은에게 한 수 배우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국민이 국내 정치에 관심을 끄도록 하기 위해 그 또한 미국의 적을 자극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진H리 전 AP통신 평양특파원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11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