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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요금 달랑 1000원, 철원 가는 기차여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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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원선을 달리는 통근열차. 단돈 1000원으로 동두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1시간여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경원선을 달리는 통근열차. 단돈 1000원으로 동두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1시간여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서울 시내 마을버스(900원)는 탈 수 있어도 지하철(1250원) 표 한 장을 사기엔 부족하다. 1000원은 이 정도의 적은 돈이다. 하지만 가치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여행이 있다. 통근열차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이다.

동두천역~백마고지역 통근열차 #5량짜리 완행 … 곧 사라질 운명 #종착역 내려 3시간짜리 시티투어 #옛 노동당사, 지하 50m 땅굴 견학

통근열차는 경원선 동두천역과 백마고지역 사이를 운행하는 완행열차로 운임이 1000원에 불과하다. 지난 21일 한국에서 가장 저렴한 통근열차를 타고 강원도 철원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질러 동두천역에 닿았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의 박준규(43) 작가는 “통근열차가 출발하는 동두천역은 기차 마니아에겐 성지 같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한국 철도는 속도에 따라 고속열차(KTX·SRT), 특급열차(ITX 새마을), 급행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 등으로 나뉘는데 최하위 등급인 보통열차에 속한 완행열차가 바로 통근열차다. 현재는 경원선 일부 구간인 동두천역~백마고지역에만 통근열차가 다니고 있다.

지금은 폐지된 통일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통근열차 내부.

지금은 폐지된 통일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통근열차 내부.

통근열차는 시속 300㎞를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전국을 연결하는 시대에 좀처럼 느끼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가득하다. 일단 온라인으로 예약할 수 없다. “어른 한 장요”를 외치고 백마고지역행 표를 샀다. 통근열차 차량은 5량밖에 되지 않아 앙증맞아 보였다. 내부는 완행열차의 정서가 가득했다. 붉은색 쿠션으로 덮인 통근열차 좌석은 지금은 없어진 ‘통일호’ ‘비둘기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등받이를 움직여 좌석의 순방향과 역방향을 조절하고 창문도 열었다. 무엇보다 동두천역부터 백마고지역까지 43㎞를 한 시간 동안 달리는 기차인데 지하철 요금보다 적은 돈으로 탈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박 작가는 “통근열차는 지하철이 연결되지 않는 근교 주민의 편의를 위해 코레일이 적자를 감수하면서 제공하는 열차 서비스”라고 일러줬다. 2019년 연천역까지 지하철 1호선이 연장되면 통근열차는 언제 폐지돼도 이상할 것이 없단다.

기차가 천천히 북녘을 향해 내달렸다.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곡식이 여무는 평야가 드러났다. 사이사이 군부대도 보였다. 동두천역을 출발한 통근열차는 55분 후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역에 도착했다. 백마고지역은 역무원도 근무하지 않는 작은 역으로 대한민국 최북단 역이자 철도중단점이다. 통근열차가 다니는 경원선은 원래 백마고지역을 지나 철원역, 월정리역 그리고 지금은 북한 땅에 속한 강원도 원산까지 이어지는 철로였지만 분단과 함께 중간에 뚝 끊긴 불완전한 신세가 됐다.

이왕 철원까지 왔으니 3시간짜리 시티투어(어른 1만4000원, 어린이 9000원)를 해보기로 했다. 백마고지역에서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40인승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시티투어 버스에 탑승한 철원군 문화해설사 안재권(64)씨는 ‘안보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철원 사람은 이곳을 ‘전방’이라고 부릅니다. 후방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최전방의 풍경이 이색적일 겁니다. 아직 대한민국은 휴전상태라는 증거를 눈앞에서 볼 수 있거든요.”

안 해설사 말마따나 철원엔 긴장감이 돌았다. 민간인통제선 안쪽으로 버스가 진입할 때는 무장한 군인이 차량에 탑승해 인원을 일일이 체크했고, 군부대 주변에 ‘지뢰’라고 쓰인 경고 팻말도 여럿이었다.

강원도 철원에 뼈대만 남아 있는 노동당사. 북한 측이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게 현존해 있다.

강원도 철원에 뼈대만 남아 있는 노동당사. 북한 측이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게 현존해 있다.

시티투어 버스는 뼈대만 남아 있는 앙상한 건물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근대문화유산 22호로도 지정된 노동당사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장소이기도 하다. 안 해설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북한은 발 빠르게 철원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렸다”며 “한국전쟁 중 철원 이북으로 북한 세력을 밀어낸 연합군이 탱크로 노동당사를 올라간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철원 안보관광의 핵심 여행지라 할 수 있는 땅굴도 들렀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모두 4개 있는데, 발견된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1975년 존재가 알려진 제2땅굴은 구경이 가능하지만 사진 촬영은 철저히 금지돼 있다. 안전모를 쓰고 지하 50m 아래로 들어서자 동굴 피서를 온 기분이었다. 땅굴을 수색하면서 북이 설치해 놓은 폭탄 때문에 국군 7명이 전사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오싹하기까지 했다.

시티투어 버스는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평화전망대를 거쳐 월정리역에 닿았다. 민통선 이북에 있는 월정리역은 영업을 멈춘 폐역으로 한국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철원군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광용’ 월정리역 역사를 새로 지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만 만들 수 있는 ‘테마파크’ 같았다. 하지만 폐역의 쓸쓸함만은 ‘리얼’했다.

철원=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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