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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민주주의와 평등한 소득분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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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는 소득분배를 더 평등하게 하는가? 독재 정부는 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정책을 주로 시행하고 서민들의 소득 향상에는 관심이 적다. 반면에 민주주의에선 정치 권력이 골고루 나누어져 있어 정부가 국민 다수를 위해 소득분배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민주적인 정부가 분배를 개선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여론에 너무 민감해 제대로 된 소득분배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거나 섣부른 판단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소득 불평등 개선해야 하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 막아야 #정부 지출의 효과 분석하고 #교육·노동·산업 개혁 함께 해야

민주주의에서 정부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가 중요하고, 특히 중간 계층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할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의 자료를 보면 민주주의가 더 발전한 국가일수록 세금을 올리고 저소득층 소득보전, 연금, 실업수당, 주택보조 등 복지지출을 늘려 분배를 개선하려 한다.

이와 같은 소득재분배 정책은 소득 불평등을 교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다. 1980년대부터 많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은 국제무역, 기술발전, 교육 불평등이 주 요인이었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들어오면서 경쟁국가들의 미숙련 노동자 임금이 정체되었다. 자본과 숙련 노동자를 더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전체 노동소득의 몫이 줄었고, 고학력과 저학력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커졌다. 기업·산업 간 격차도 커졌다. 인간이 하던 일들을 대체하는 기계와 전 세계 국가들과 힘들게 경쟁해야만 일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정부가 사회적 약자와 취약 계층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면서 경제가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만족하는 공정한 분배를 하면서 동시에 지속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복지지출을 늘리는 손쉬운 정책으로 ‘큰 정부’만 만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미국의 2007년 금융위기는 분배를 개선하려는 선한 의도의 정책이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보여 준다. 당시 미국은 소득 불평등이 심했고 특히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내 집이 없는 도시 빈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많은 시의회가 저소득층 서민들이 은행 대출을 쉽게 받아 집을 살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저금리 정책과 맞물려 부동산 거품이 커졌고 결국 거품이 붕괴하면서 ‘비우량 주택대출(subprime mortgage)’의 부실로 이어졌다. 금융위기로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소득분배가 더욱 악화되었다.

소득분배를 평등하게 하는 재분배 정책은 성장을 둔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세금 인상과 비생산적 정부 지출은 자본축적과 기술발전을 저해하고 근로의욕을 감소시켜 경제성장률을 낮춘다. 일부 학자들은 소득분배의 개선이 경제성장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한 분배가 가계소비를 단기적으로 늘리고 능력 있는 개인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사회를 안정시켜 투자를 촉진하는 등의 간접적인 경로로 성장에 기여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효과가 적어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요인이 되기는 어렵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모두에게 퍼주는 인기 영합적인 정책이 많아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적자가 계속 늘어날 수 있다. 지금 투표권이 없는 미래 세대에 파탄 난 재정과 고갈된 연금을 떠맡기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1998년 당선 후 무상 복지지출을 급격히 늘려 대중의 지지를 얻고 총 4선에 성공해 14년간 장기집권을 했다. 그러나 재임 중에 경제 체질 개선을 소홀히 했고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결국 재정이 파탄났다. 올해 재정적자가 국민총생산의 20%에 달하고 물가상승률은 670%, 경제성장률은 -9%로 시민들이 생필품도 구할 수 없는 파국을 맞았다.

민주적인 정부가 국민의 넘치는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려다 보면 제대로 된 정책을 취사선택해 실행하기 어렵다. 정부 지출의 경제적 효과를 잘 따져 보고 미래 세대의 부담을 고려해 좋은 정책들을 골라 추진해야 한다.

계층 간 이동성을 높이기 위해 공교육을 개혁하고 모두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열린 노동시장을 만들며 기술진보에 맞추어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혁신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새로운 내수시장과 서비스산업을 발전시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들은 분배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당장 성과를 내기가 어려운 정책들이지만 앞으로 5년만이 아니라 먼 미래를 보는 민주 정부의 경제정책이 가야 할 길이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