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江南人流]판이 달라졌다…모델테이너가 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2면

요즘 방송이나 영화에서 좀 뜬다 싶은 이들에겐 공통된 스펙(경력)이 있다. 바로 ‘모델 출신’이라는 점이다. 무표정으로 런웨이를 걷는 모델만의 신비주의는 옛말, 키 만큼 큰 끼를 장착한 모델들이 연예 활동에 나섰다. 훤칠한 키, 가늘고 긴 팔다리, 주먹만한 얼굴 등은 숱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대중에 이름을 알리기에 강력한 무기가 된다. 최근 2~3년 사이 모델의 연예계 진출이 늘다보니 이제는 ‘모델테이너(Model+Entertainer)’라는 타이틀도 생겨났다. 이들이 왜 주목 받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세계를 들여다봤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8월 24일 개봉하는 영화 ‘VIP’에서 김명민·장동건·박희순과 함께 주연을 맡은 이종석은 대표적인 모델 출신 배우다. [사진 전소윤(STUDIO 706), 장소협찬=콴시(QUANXI)]

8월 24일 개봉하는 영화 ‘VIP’에서 김명민·장동건·박희순과 함께 주연을 맡은 이종석은 대표적인 모델 출신 배우다. [사진 전소윤(STUDIO 706), 장소협찬=콴시(QUANXI)]

모델로 '새 피' 수혈하는 방송

이종석·김우빈·안재현·이성경-. 최근 흥행 보증 수표로 떠오른 배우들은 알고 보면 하나같이 모델 출신이다. 연예계 데뷔 전 이미 유명 패션쇼 무대에 섰던 이들이 브라운관·스크린으로 넘어오는 수순을 밟았다.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처럼 외모가 출중하다는 의미)·바비 인형(이상적 몸매라는 뜻)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데뷔 순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도 닮았다.
배우만이 아니다. 예능·가요 분야에서도 모델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상상 이상의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종합편성채널·케이블 채널을 중심으로 새 예능 프로그램이나 새 출연진을 선보였다 하면 모델 출신이 꼭 끼어 있다. '발칙한 동거'(진정선)· '열정같은소리''하트시그널'(심소영)·'소사이어티게임2'(유리)·'갑자기 히어로즈'(주우재) 등 근래 나온 신작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모델들의 연예계 진출이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90년대에 진희경·박영선·차승원 등 당대의 톱 모델들이 배우로 각광받은 바 있다. 이소라·송경아·장윤주·한혜진·강승현 등이 그 뒤를 이어 패션·뷰티 관련 방송에서 진행자·패널로 나서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큰 키 만큼 끼 많은 모델, 흥행 보증수표 #모델테이너 전성시대

안재현ⓛ·한혜진②·김우빈③·이성경④·남주혁⑤ 등 드라마·예능 프로에서 활약 중인 모델테이너들. [사진 중앙포토·에스팀·YG케이플러스]

안재현ⓛ·한혜진②·김우빈③·이성경④·남주혁⑤ 등 드라마·예능 프로에서 활약 중인 모델테이너들. [사진 중앙포토·에스팀·YG케이플러스]

모델 에이전시-연예기획사 협업시대

다만 당시와 확실히 달라진 점은 있다. 최근 2~3년 사이 모델 에이전시들이 연예기획사와 손을 잡으면서 모델이라는 '업'의 기류 자체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국내 모델 에이전시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케이플러스는 2014년 말 연예매니지먼사 YG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며 YG케이플러스가 됐고, 다른 하나인 에스팀은 이듬해 SM엔터테인먼트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뒤이어 중소 규모의 모델 에이전시와 연예기획사가 줄줄이 합쳐지며 클라이믹스 모델컴퍼니와 COL엔터테인먼트 등이 생겨났다.

패션 뷰티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약하는 강승현(왼쪽)과 패션 콘텐트제작으로 인스타 팔로어 수 100만을 자랑하는 모델 아이린.

패션 뷰티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약하는 강승현(왼쪽)과 패션 콘텐트제작으로 인스타 팔로어 수 100만을 자랑하는 모델 아이린.

이런 과정을 통해 모델 에이전시가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YG케이플러스 매니지먼트팀 김성란 이사는 "모델들의 겸업을 위한 '공격적인 육성 시스템'이 이때 처음 마련됐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패션쇼나 잡지 화보 촬영에 필요한 모델 선발을 하는 게 모델 에이전시의 주 업무였다면, 이후에는 모델들의 스타성을 부각시키고 영역을 넓히는 데 목표를 둔다. '모델테이너'라는 신조어는 바로 이런 변화에서 생겨났다.
요즘 모델이 되겠다는 이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최소라·수주처럼 해외 컬렉션에 나가는 걸 목표로 삼는 정통파도 있지만 아예 처음부터 모델 겸 배우·가수를 꿈꾸며 아카데미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16년 겨울 패션쇼 런웨이에 데뷔, 케이블 프로 '겟잇뷰티' 웹드라마 '우리 할 수 있을까' 등에 출연했던 모델 박종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또 다른 재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게다가 전업 모델만으로는 수입이 일정치 않고 직업 수명이 사실상 20대에 끝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신장 제한 오히려 낮아져

모델 에이전시가 말하는 '공격적 육성 시스템'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일단 아카데미의 교육생 선발부터 이전과 다르다. 최소 신장이 전보다 오히려 더 낮아졌다. '여자는 170cm 이상'이 과거 불문율처럼 지켜져온 기준이라면 요즘은 167cm 정도로 유연해졌다. 에스팀 소속 교육기관 '이스튜디오' 김명지 팀장은 "런웨이 말고도 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분야가 더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성이 보인다면 키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모델테이너를 염두에 두고 모집 때부터 '수료 후 희망 영역'을 따로 파악하기도 한다.

YG케이플러스의 교육생 수업에서 댄스 연습을 하는 모델 지망생들. [사진 YG케이플러스]

YG케이플러스의 교육생 수업에서 댄스 연습을 하는 모델 지망생들. [사진 YG케이플러스]

수업 커리큘럼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엔 워킹·포즈 연습이 80%를 차지했다면 이제는 연기·댄스·진행 등 끼를 끌어내는 수업에 60%를 할애한다. 수업 내용도 '실무 중심'이다. 가령 과거 연기 수업이 "네가 쓰레기통이 돼서 표현해봐"라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기존 광고나 배역을 보고 따라해 보는 연습을 한다. 에이전시에 따라서는 '자기 마케팅 홍보'를 수업에 넣기도 한다. 에스팀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관리부터 '좋아요' 많이 받는 요령, 사진 잘 나오는 법, 패션 스타일링 등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강의를 한다. 해외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모델의 SNS 팔로어 수가 중요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브랜드 화보 모델을 하더라도 촬영 분을 개인 SNS 계정에 올려 얼마나 다수에게 노출되느냐로 영향력을 평가받는다. 방송에 출연하는 신인의 경우 온라인상에서 얼마나 알려진 인물이냐가 캐스팅의 중요한 기준이 될 정도다. 실제로 모델 아이린은 팔로어 100만에 육박하며 해외 브랜드에서 먼저 찾는 인물이 됐고, 예능 프로 '소사이어티2'에 캐스팅 된 유리는 두 달 사이 팔로어 수를 3만~4만명 늘리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스튜디오의 모델 수업은 처음부터 연기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마케팅, 스타일링 등모델테이너를 염두에 두고 실무 중심으로 꾸려진다.[사진 에스팀]

이스튜디오의 모델 수업은 처음부터 연기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마케팅, 스타일링 등모델테이너를 염두에 두고 실무 중심으로 꾸려진다.[사진 에스팀]

여기까지가 아카데미에 등록한 교육생용 시스템. 정식 오디션을 통해 뽑은 소속 모델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일단 에이전시가 운영하는 웹 채널과 디지털 매거진 등을 통해 이름과 얼굴을 알린다. 에스팀은 에스팀 TV, 매거진 '셀프 에스팀'을 통해 신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자체 콘텐트를 만들고 있고, YG케이플러스 역시 YG 소속 연예인들과 함께 출연하는 웹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한다. 과거처럼 패션쇼나 주요 패션 잡지가 아니더라도 이 자체가 '연예인 지망생을 위한 포트폴리오'가 되는 셈이다.
과거엔 런웨이에서 어느정도 입지를 굳힌 톱모델들이 연예 활동에 나섰다면, 이같은 시스템을 통해 요즘에는 데뷔와 거의 동시에 연예계에 발을 담그는 변화가 나타났다. 남주혁은 고작 데뷔 6개월 만에 케이블TV 드라마의 연기자로 얼굴을 비쳤고, 방주호 역시 2015년 가을 처음 패션쇼 무대에 선 뒤 같은 해 웹예능 '미스터 츄 1' 출연했다. 에스팀 홍은주 실장은 "멤버를 모으고 그룹을 만드는 아이돌의 경우 연습생부터 데뷔까지 몇 년씩 걸리고, 또 하나의 캐릭터를 잡는데도 시간이 드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고 말했다.

등장만 해도 화보…비주얼 시대의 승자  

교수부터 정치인까지 누구나 방송인이 되는 시대, 게다가 외모와 끼를 겸비한 스타 지망생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모델테이너가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양성 시스템 덕분일까.
모델계나 방송계가 가장 먼저 꼽는 요인은 역시나 '남다른 기럭지'다. 잘생기고 예쁘고,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수준을 넘어서는 평균 이상의 키와 비율, 만화같은 가늘고 긴 팔다리가 강력한 무기다. 다들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이게 이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싶지만, 답은 그렇다.
지금은 비주얼 시대다. 방송이나 영화뿐 아니라 SNS, 웹 드라마, 유튜브 등 영상 콘텐트가 쏟아지고, 저마다 '패션 화보 같은 그림'을 만들어 낼 인물을 찾는다. 남주혁을 처음 배우로 캐스팅한 tvN드라마 '잉여공주'의 백승룡 PD 이야기도 비슷하다. "당시 대본에 나온 만화 같은 외모가 현실에 그대로 있어 보자마자 캐스팅했다"면서 "남주혁 말투에 부산 사투리가 남아 있어 아예 배역을 그에 맞게 바꿨다"고 말했다. 연기력이나 발성을 문제삼기는커녕 아예 캐릭터까지 바꿔버릴 정도로 귀하게 모셨다는 얘기다. 방송계에서 "연기나 노래는 가르치고 연습하면 늘지만 기럭지는 늘릴 도리가 없다"며 모델 예찬을 서슴지 않는 건 그래서 냉정하지만 현실적이다.
모델 스스로도 달라졌다. 과거 무표정한 카리스마를 모델이 어필하는 특기로 삼았다면 영상 콘텐트가 주류가 된 이제는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세운다. 가령 이성경은 SNS에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포스팅해 화제가 됐고, 입담 좋기로 소문난 주우재는 아예 개인 방송 경력을 쌓은 덕분에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 섭외 1순위 모델로 꼽힌다.
그런가하면 권현빈은 모델 활동 중 소속 에이전시인 YG케이플러스 오디션에서 선보인 랩 실력을 인정 받아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했다.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에 모델 에이전시가 소속 모델을 내보내는 진풍경을 보게 된 배경이다.

최근 예능·드라마에서 주목 받는 ‘새 얼굴’들 중엔모델 출신이 유독 많다. 왼쪽부터 권현빈·심소영·장기용·진정선 [사진 중앙포토·YG케이플러스]

최근 예능·드라마에서 주목 받는 ‘새 얼굴’들 중엔모델 출신이 유독 많다. 왼쪽부터 권현빈·심소영·장기용·진정선 [사진 중앙포토·YG케이플러스]

예능 프로 SNL 권성욱 PD는 "매 시즌 개성 있는 고정 출연자를 새로 뽑는데 이번에는 최종 오디션에 오른 40%가 모델 출신일 정도로 모델 중에 끼 많은 이들이 많다"며 "고학력·유학파로 상식·퀴즈나 영어를 장기로 삼는 이들도 꽤 된다"고 말했다. YG케이플러스 김성란 이사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은 어릴 적 이미 댄스·악기·마술 등을 배우는 '엔터 사교육'에 익숙한 세대"라고 분석했다.
달라진 팬덤 문화도 모델테이너 전성시대에 한 몫 한다. 패션에 관심 있는 10대들 중 연기자나 가수 등 연예인보다 모델에 더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TV에 나오는 아이돌·배우보다 웹 콘텐트나 화보에서 눈에 띄는 모델을 찍어 후원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남이 키운 스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발견하고 알아봤다는 뿌듯함이 여느 팬들과 다른 점이다. 케이블방송·모바일 콘텐트에 출연하는 모델 김승환 역시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팬들이 만든 인스타그램만 10여 개에 달한다. 그는 "포털에 팬 카페가 개설돼 실시간으로 팬들과 채팅을 한다"면서 "기획사의 관리 아래 거리를 두는 여느 스타보다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모델테이너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