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법관 일은 법관에게"…주목받는 김명수의 ‘춘천 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월 김명수(58‧사법연수원 15기) 대법원장 후보자(당시 춘천지법원장)는 춘천지법 판사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법원장이 의장을 맡는 판사회의에 20여 명의 판사들이 모였다. 이날 안건은 판사들의 사무분담표 확정이었다. 사무분담은 영장 담당과 민‧형사 사건 재판부 등을 구성하고 재판 사무를 나누는 법원 조직의 핵심 업무다. 그런데 김 법원장은 안건을 제안한 뒤 회의장에서 곧바로 나갔다.

춘천지법서 사무분담 판사회의로 결정 #법원장 권한 내려놓고 판사회의 실질화 #"사법행정 수평화" 요구와 일맥상통 #"법원의 일은 법관이 해야 사법독립"

“판사들끼리 토론해서 사무 분담을 정해 보라”는 지시만 내렸다. 이례적인 상황에 판사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사무 분담 토론이 진행됐고 회의에서 모인 의견은 거의 그대로 반영됐다. 당시 판사회의에 참석했던 한 판사는 “처음있는 일이어서 다들 어리둥절했는데, 우리 사무를 정하는 것이어서 내실있는 토론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판사들간에 회자되는 김 후보자의 파격의 한 장면이다. 사건 배당과 함께 법원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판사들에게 맡겨 이 일화는 ‘춘천 실험’으로 불린다. 법원의 사무분담은 법원장이 수석부장판사와 의논해 결정한 뒤 판사회의에서 형식적인 동의를 구하는 게 관행이었다.

춘천지법의 다른 판사는 "김 후보자가 법원장을 맡은 지난 1년 동안 판사회의에서 각종 법원 내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연합뉴스]

김 후보자 지명 이후 법원 내부에서 당시 '춘천 실험'에 주목하고 있다. 판사회의에 실질적인 의사 결정 권한을 주고, 수직적인 사법행정을 바꾼 것이 최근의 사법개혁 논의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김 후보자가 법원행정처 중심의 사법행정에 반기를 들어왔다는 점에서 향후 사법부 변화와 연결짓는 해석도 나온다.

김 후보자가 초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지난 3월 개최한 사법개혁 관련 토론회에서 법원장의 사무분담권을 선거로 구성한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 운영위원회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또 법원장을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에서 호선해 결정하자는 개선방안도 제시했다.

이후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법관대표회의 상설화’와 법원행정처 권한 축소·견제를 위한 제도개선 방안을 내놨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관회의 상설화 요구를 수용했다.

2012년 2월 대전지법에서 열린 평판사 회의장 입구의 모습. [중앙포토]

2012년 2월 대전지법에서 열린 평판사 회의장 입구의 모습. [중앙포토]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에 임명되면 법관회의 상설화와 그의 ‘춘천 실험’이 맞물려 사법부 전체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 중 9명이 김 후보자의 선배라는 점도 대법원의 수직적인 구조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불거진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한 처리도 향후 사법부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김 후보자는 22일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났다. 그는 대법원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에게 "분에 넘치는 기대, 그리고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내용이었다"며 "기대에는 더욱 부응하고, 우려는 불식시키는 철저한 청문회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파격 인사’라는 평가에 대한 질문에 "저는 재판만 해 온 사람이다. 저도 두렵고 불안한 감이 있지만,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마 출발을 안했을 것"이라며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김 후보자는 이날 대법원 방문을 위해 현 근무지인 춘천에서 오면서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춘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