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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팟 터지면 이력서 따위는 … ” 도박 지옥에 빠진 N포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위기의 ‘취준남’ <하>

‘메가 잭팟 297,676,846원’.

20대 중독 환자 4년 새 3.4배로 #카지노서 죽치며 인생역전 베팅 #대학생들 사설 토토에 쉽게 유혹 #첫 25만원 딴 뒤 5000만원 빚 27세 #“부모님이 안 갚아줬으면 아직도 … ”

지난 11일 저녁 취업준비생 김모(26)씨가 강원랜드 카지노 안에서 슬롯머신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자릿수도 세기 힘든 숫자 아래에서 한 손 가득 5만원권 지폐 묶음을 들고 있었다. 김씨는 “취업도 안 되고, 남들은 휴가를 떠나는데 나도 머리나 식힐 겸 쉬러 왔다”고 말했다. 이어 “혹시 잭팟이라도 터지면 이력서 쓸 필요도 없이 바로 인생역전 아니냐”며 웃었다.

카지노에는 김씨와 같은 20~30대 젊은 남성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하루 종일 실내에 있었는지 에어컨 바람을 막으려고 담요를 두른 남성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한 딜러 박모(27)씨는 “예전보다 내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는 거의 이곳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20대에겐 어울리지 않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도박장에 취준생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도박에 대한 관심은 온·오프 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대학생 도박 문제의 실태와 대응 방안’이라는 논문을 쓴 김영호 을지대 중독상담학과 교수는 “취준생들이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마지막 창구로 도박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헬조선·N포세대(여러가지를 포기하는 세대)·금수저론 등의 담론이 취준생들의 불안·우울감을 키웠고, 취업 전선에 내몰리자 일확천금을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보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 자존감이 낮아진 데다 온라인 도박은 집 안에서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쉽게 빠진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도박 중독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 1099명 중 20대(366명)와 30대(418명)는 전체의 71.3%였다. 5년 전 51.6%보다 약 20%포인트 늘었다.

특히 20대는 2012년 108명에서 지난해 366명으로 환자 수가 3.4배가 됐다. 40대 이상 전체 환자 수를 합친 것(343명)보다 많다. 평가원 관계자는 “전 세대에서 도박 환자 수가 미미하게 감소하는데 20~30대만 급격히 늘고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도박 중독은 불안·우울감과 비례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도박은 ‘사설 토토’로 불리는 불법 스포츠 도박이다. 한국심리학회가 2014년 펴낸 논문 ‘대학생의 스포츠토토 경험 유형에 따른 도박 중독 심각성에 대한 차이 연구’에 따르면 사설 스포츠 도박 사이트 전체 가입자 중 34%가 20대 대학생이다. IT 기술의 발전, 스마트폰의 확산 등으로 2012년 조사 때보다 3~4배 증가했다. 시장 규모도 2012년 7조원대에서 2015년 21조원대로 커졌다.

2011년 군 전역 후부터 지난해 취업할 때까지 사설 토토에 빠졌다는 김모(27)씨는 “아는 형의 권유로 접한 첫 판에 25만원을 번 게 화근이었다. 이후 대출이 쌓여 빚이 5000만원까지 늘었다. 스마트폰을 여러 번 던져 깨뜨렸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지난해 부모님이 돈을 모두 갚아주고 취업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빚을 만회하겠다고 밤낮 도박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임정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예방교육과장은 “사설 토토는 20대 남성들이 좋아하는 ‘3박자’를 갖췄다. 스포츠 기반, 온라인 게임과 유사한 인터페이스, 경쟁 심리 자극 등이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일부 20대 취준생들의 한탕주의와 도박의 연결고리를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해외에 기반을 둔 온라인 불법 도박을 단속하기는 쉽지 않다. 김영호 교수는 “‘헬조선’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도박에 빠지는 것은 진짜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도박은 절대로 청년의 희망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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