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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문 대통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 한 '임청각'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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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경북 안동에 있는 고택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임청각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 등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며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동 고택 임청각 언급 #"석주 이상룡 선생 등 아홉 분 독립투사 배출한 곳"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공간" #일제 99칸 대저택 반토막, 지금은 70칸만 남아 #마당만 6개 넘어 눈길 "역사적 장소로 복원해야"

그러면서 "아흔아홉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일제에 의해 반토막난 모습이 아직 그대로"라며“이상룡 선생의 손자ㆍ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청각 정문 앞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일제 시대 기차길이 생겨 임청각 앞쪽 99칸 중 30칸이 소실됐다. 안동=백경서 기자

임청각 정문 앞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일제 시대 기차길이 생겨 임청각 앞쪽 99칸 중 30칸이 소실됐다. 안동=백경서 기자

이상룡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1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임청각 등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는 1942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안이라 해 이 선생의 아흔아홉칸 임청각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설치해 저택을 반토막 냈다.

광복절을 맞아 경북 안동 임청각에 놀러온 가족. 안동=백경서 기자

광복절을 맞아 경북 안동 임청각에 놀러온 가족. 안동=백경서 기자

15일 오후 찾은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무와 흙으로 단단하게 지어진 조선시대 한옥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마당만 6개가 넘는 대저택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 등으로 가지런히 구분돼 있었다.

지난 2000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도 활용 중이다. 온돌방만 12개가 넘었다. 이날 자녀 둘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임청각을 찾은 오은석(47)씨는 "오전에 문 대통령이 언급한 것을 보고 경기 용인에서 안동으로 출발했다"며 "비온 뒤라서 그런지 고즈넉한 풍경이 멋지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임청각의 비오는 날 전경. 안동=백경서 기자

경북 안동에 위치한 임청각의 비오는 날 전경. 안동=백경서 기자

5289㎡ 부지에 지어진 임청각은 영남산을 등지고 낙동강이 앞에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지형이었다. 일제가 집 앞마당에 기찻길을 내는 바람에 더이상 낙동강이 흐르는 풍경을 볼 순 없었지만, 여전히 70칸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임청각 김호태 관리인은 "일제 때 안동 철도 관사로도 사용되기도 했다"며 "일제 만행없이 관리만 잘 됐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임청각에 살고 있는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씨. 안동=백경서 기자

현재 임청각에 살고 있는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씨. 안동=백경서 기자

임청각에는 석주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78)씨가 살고 있다. 그의 방에는 지난해 5월 27일 당시 국회의원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임청각을 찾아 밥 한끼를 먹고 가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절의 집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멸사봉공 애국애족정신을 새기며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다짐합니다"라는 글을 써서 이씨에게 전달했다. 이씨는 이 글을 액자에 담아 한쪽 벽에 걸어 두었다. 이씨는 "현재 기찻길을 다른 쪽으로 내도록 공사 중인 걸로 안다"며 2020년쯤되면 임청각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경북 안동 임청각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후손 이항증씨에게 남긴 글. 안동=백경서 기자

지난해 5월 경북 안동 임청각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후손 이항증씨에게 남긴 글. 안동=백경서 기자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인 임청각은 1519년에 지어졌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로 영산 현감인 이증이 안동에 들어와 터를 잡았고 이후 이증의 셋째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역임한 이명이 건축했다.
임청각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상징 공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이상룡 선생 때부터다. 이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만 9명이 가족 중에서 나왔다.
아들 이준형(1875~1942)공과 손자 이병화(1906~1952)공, 동생 이상동(1865~1951)공, 조카 이형국(1883~1931)공, 조카 이광민(1895~1946)공 등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부인 김우락(1854~1933) 여사와 며느리 이중숙(1875~1944)여사, 손부 허은(1907~1997) 여사까지 하면 12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양반가로 귀하게 생활했지만 가족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이 중 이 선생의 아들인 이준형 공은 아버지가 죽자, 몇년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도 더 살 수 없다며 자결했다. 손자인 이병화 공은 1934년 일본 경찰서를 습격한 혐의로 신의주에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7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이렇게 임청각을 통해 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 것은 문 대통령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문 대통령의 추천을 받은 이낙연 국무총리도 지난 10일 여름휴가지로 임청각을 찾아 돌아봤다. 안동시는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문화재청과 함께 일제강점기 강제 훼손된 임청각 원형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발빠르게 발표했다.

지난 2014년 1억원을 들여 임청각 주변 시설정비에 이어 지난해부턴 4억3000여만원을 들여 사당 지붕해체보수 사업 등을 진행중이라고 했다. 유홍대 안동시 문화예술과장은 "(문 대통령의 언급으로) 임청각의 원형 복원 사업에 속도가 더 붙을 것"이라며 "이상룡 선생 생가 원형 복원과 함께 굳은 절개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학술대회와 기념관 건립 등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 대통령이 이날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언급하자, 순간 접속자가 몰리면서 임청각을 소개하는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다.

안동=김윤호·백경서 기자, 위문희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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