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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범' 염정아, "연기하는 게 매일매일 더 재미있다"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보이진 않는다. 들릴 뿐이다. 당신을 가장 애달프게 하는 목소리가. ‘장산범’(8월 17일 개봉, 허정 감독)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사람을 홀린다는 괴담의 주인공, 장산범을 소재로 한 서스펜스 스릴러다. 하지만 영화는 그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신묘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밝히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그보다는, 잃어버린 아이를 그리워하고,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어미의 마음, 그 애절한 드라마를 그리는 데 힘을 쏟는다.

5년 전, 어린 아들 준서를 잃어버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희연(염정아). 치매 환자인 시어머니 순자(허진)의 요양을 위해 시골로 이사한 희연의 가족은 의문의 여자아이(신린아)와 만나면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희연이 여자아이에게 빠질수록, 남편 민호(박혁권)는 그 아이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신출귀몰한 장산범의 공포에 몸서리치면서도,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애절한 마음. 당신이라면 그 목소리를 두고 매정하게 발길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두 배우, 염정아와 박혁권은 지난해 이 영화를 찍는 내내 그 물음을 가슴으로 품었다고 했다.

염정아 / 사진=전소윤(STUDIO 706)

염정아 / 사진=전소윤(STUDIO 706)

‘범죄의 재구성’(2004, 최동훈 감독)의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푼수부터, ‘카트’(2014, 부지영 감독)의 대형 마트 계약직 직원의 피곤한 민낯까지.어느 배우보다 다채롭고 도전적인 캐릭터를 선보여 온 배우 염정아(45). 그의 선택은 언제나 용감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미스터리 스릴러에 출연한 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 옴니버스영화 ‘쓰리, 몬스터’(2004) 중 박찬욱 감독의 ‘컷’ 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이 장르의, 완성도 있는 시나리오를 받은 게 그만큼 오랜만이었다. 미스터리 스릴러나 공포영화가 시나리오를 잘 쓰기 힘들다. 자칫하면 유치해지니까.”

―‘장산범’의 시나리오는 뭐가 달랐나.
“잃어버린 아이를 그리워하고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희연의 마음이 극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 시나리오를 보면서 진짜 많이 울었다. 특히 희연의 마지막 선택에 무척 공감했다. 그 결말이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실제 두 아이의 엄마라 희연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겠다.
“물론이다. 어디선가 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도 그걸 외면하고 도망치지 못할 것 같다. 남편이 동지 같은 존재라면, 아이들은 아직까지는 내가 지켜야 하는 존재니까. 부모라면 다 그럴 거다.”

염정아 / 사진=전소윤(STUDIO 706)

염정아 / 사진=전소윤(STUDIO 706)

―‘장화, 홍련’의 계모 은주 역을 통해 보여 줬던 섬세하고 예민한 연기와 ‘카트’의 선희 역으로 선보인 지극히 일상적인 연기, ‘장산범’의 희연이 그 접점에 있는 느낌인데.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처음부터 희연은 심신이 아주 약한 상태로 등장한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애를 다른 가족들은 다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희연은 그를 잃어버린 아들 돌보듯 한다. 그 모습을, 평범한 일상인데 희연이 뭔가에 홀린 듯한, 작은 판타지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으로 연기했다. 관객이 ‘어, 희연이 자꾸 저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도록. 기본적으로 슬픔에 차 있는 희연이, 장면별로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흐름이 정교해서 어느 한순간도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서늘한 분위기 안에서 희연의 슬픔을 전달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았다.”

―장산범은 목소리로 사람을 홀린다. 평소 소리에 예민한 편인가.
“‘장화, 홍련’에 출연하기로 하고 김지운 감독님과 차를 마시면서 영화 얘기를 하는데, 감독님이 나한테 ‘작은 소리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 김 감독님이 사람을 참 잘 관찰하거든. 난 나한테 그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한마디로 정신없는 사람인 거지(웃음). ‘장화, 홍련’의 은주를 연기하면서 나의 그런 면을 극대화해 표현했다. ‘장산범’의 희연은 그보다는 더 일상적인 느낌을 주려 했다.”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 스틸컷

―1991년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선으로 입상한 뒤 배우로 데뷔해 ‘장화, 홍련’의 계모, ‘범죄의 재구성’의 사기꾼, ‘카트’의 계약직 노동자 역 등 다양한 작품에서 도전적인 캐릭터를 도맡았다.
“작품을 선택할 때 ‘이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건 따지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만 본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최선을 다할 수 있으니까. 너무 위험한 선택을 한다 싶으면 소속사에서 말리겠지(웃음). 내가 또 귀가 얇아서 그런 얘기 들으면 금방 포기한다(웃음).”

―40대인 지금은 누구보다 알찬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중견 배우이자, 단란한 가정을 이룬 자연인으로서 굉장히 안정적인 삶을 꾸려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굉장한 칭찬인데(웃음). 2006년 말 결혼하고 나서 한동안은 결혼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있는 게 좋았다. 애를 낳고, 아이들이 엄마 손을 한참 필요로 하는 시기를 지나고 나니까 집에만 있는 게 슬슬 지겨워지더라. 사실 주부들 대부분이 결혼하고 애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되면 일터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나는 운 좋게도 찾아 주는 분들이 있어서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하니까 매일매일 연기가 더 좋아진다. 데뷔 초와 달리 요즘은 1~2년에 한 작품씩 출연하는데, 연기할 때가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데뷔 초에는 안 그랬나.
“그때는 열심히 안 했지. 촬영장에서 신경질도 많이 냈다. ‘왜 이렇게 늦게 끝나’ 이러면서(웃음).”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 스틸컷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연기의 매력이란 뭘까.
“모르겠다. 음, 그냥 ‘배우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워낙 재주가 없다. 그림을 잘 그리기를 하나, 음악을 잘하기를 하나, 운동 신경이 뛰어나기를 하나.”

―연기야말로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일 아닌가.
“그럼 나도 타고난 재능이 조금은 있는 건가(웃음).”

―지금 배우로서 느끼는 가장 큰 갈증은 뭔가.
“좀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 이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역할들이 있지 않나. 그걸 놓치는 게 너무 아깝다. 5~6년 뒤면 지금처럼 어린아이를 둔 엄마 역은 못할 텐데 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꼭 누군가의 엄마일 필요도 없다. 관객으로서 한국영화에서 더 많은 40대 여성, 그들의 다양한 욕망과 갈등을 만나고 싶다. 당신처럼 20~30대에 도전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가 40대에도 한국영화에서 더욱 활약하면 좋겠다.
“그럼 직접 시나리오를 써 봐라(웃음). 그런 시나리오가 없다. ‘장산범’이 좋았던 것도 그래서다. 40대 여성인 희연의 마음을 극의 한 요소로 소비하지 않고 극의 중심에서 충실히 풀어간다는 점이 무척 귀하게 느껴졌다. 한국영화에 한동안 ‘남자 영화’가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 슬슬 바뀌겠지?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위해 더 많은 응원이 필요하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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