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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 노태우 대구 팔공산 용지마을서 청와대까지(상)|인내와 끈기의 「외유내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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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보통사람」임을 자임한 민정당의·노태우후보-.
국민들은 『사성장군출신이 어떻게 보통 사람일 수 있겠느냐』 는 야권후보들의 집중 포화속에서도 그를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간선 제헌법의 민정당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87년 6월10일 노후보는 후보지명의 감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6·10항쟁의 최루탄 냄새를 맡아야 했었다. 후보가 된 바로 그날부터 그는 가장 고독한 인간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각 일각 다가서는 그 긴박하고 가파른 정국의 흐름속에 스스로의 말대로 몸을 던져 도화선 차단에 나섰다.
대통령직선제등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결행한 것이다. 여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코페르니쿠스」적발상의 대전환이었다.
그가 최근에도 즐겨 말하는 것처럼 그대로 「홀람 발가벗었던것」 이다.
「영웅」(「제임즈·릴리」주한미대사)이라느니,「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김대중씨) 는 등의 극찬이 국내외로부터 쏟아졌고 그의 인기는 거의 0%에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기사회생이란말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직선제 개헌에 의한 선거전에 돌입하자 그는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는 군 출신의 정치초년범일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무수한 마의 터널을 헤쳐나가야 했다.
노련한 직업정치인들과 변화를 갈구하는 시민·학생·재야인사들로부터 그의 6·29선언은 국민에 대한 항복으로「강등」됐고 그는「12·12사태」를 주동하고 광주사태에 책임있는 「군출신」으로 환원되어 비판과 배척의 과녁이 됐다. 그렇지만 노후보는 도도히 흐른 「군정종식」의 급류속에서 완강하게 버티어 「안정속의 개혁시대」를 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노태우대통령 당선자는 1932년12월4일 (음력) 경북달성군공산면신룡동(81년 대구시 동구로 편입)의 용지라는 마을에서 당시 면유지였던 면서기 병수씨 (작고)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하노씨 세계다.
그는 모친 김태묘씨(78)가 시집와서 인근 파계사에 불공을 지성으로 드린지 8년만에 낳은 것 아기여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의 아래로두 남동생이 태어났으나 막내는 두살때 죽었고 둘째동생 재우씨는 현재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있다.
모친은 시퍼런 구렁이 한 마리가 온몸을 휘감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한학에 밝은 조부 영수씨는 태몽과 신룡마을 이름을 고려, 처음에는「태룡」 이라고 손자이름을 지으려다가 드러내는 것보다 안으로 숨기고 기를 눌러 겸손해야 한다는 뜻으로 항렬인태밑에 어리석을 우자를 넣어 태우로 작명했다고 한다.
팔공산지맥이 반달처럼 휘어달리는 서쪽끝 산자락에 위치한 용지마을은 앞뒤로 험산이 중첩한 산골마을로 지금도 대구에 편입되긴 했어도 외딴 마을임엔 변함이 없다.
당시 중농가세의 집안에서 보통학교나마 신식교육을 받아 「개명신사」로 통했던 선친은 너댓살의 그를 무릎에 앉히고 마을유일의 일제부터 유성기를 종종 듣곤했다고 했다.
『그럴 때면 으레 동네 아이들이 몰러와 노래를 같이 들었다』 고 그는 행복했던 유년기를 회상했다.
그의 유년기 친구들이 『퉁소를 잘 불었고 휘파람과 노래를 썩 잘 불렀다』고 한결같이 기억하는 것이나 경북중(구제)시절 학예회에서 작사·작곡한 노래를 불렀고 연대장·여단장. 사단장시절 꼭부대가를 작사·작곡했다든가 지금도 퉁소로 산조를 연주하고 노래를 수준급으로 부른다는 걸 보면 그렇다.
인자하나 엄격한 조부와 30대의 편모가 10여마지기의 논밭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어려운 가세에서 훈도받은 탓인지 그는 그때까지 내성적이고 온순한 아이로 자라 다른 아이들과의 다툼도 별반없었다고 한다.
그는 8세때부터 6년간 험한 산골길 시오리를 조석으로 「뛰다시피」 해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는 『자꾸 참다보니 참는게 제2의 천성이 됐다』 며『강한 주강, 서슴없는 주강을 용기라고 하지만 참기힘든것을 참는 것도 이에 못지 않은 용기』 라고 지론을 펼만큼 참는데는 이골이 났다는 평을 듣는다.
공산국교의 은사 진우섭옹(74) 은 『총명했던건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평범한 아이였다』 고 기억하면서 『1백5명의 6학년 학생들중 3등쯤해서 자신이 원한 경북중에는 어려워 대구공업중 (대구공고전신) 에 원서를 써주었다』 고 회고했다.
중학진학은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삼촌 병상씨(66)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대구 칠성동 삼초댁에서 중학시절을 보냈다. 병상씨는 조카가 중학시절 독서에 열중했다며 삼국지를 읽고난 후 『유비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이 기억난다』 고 회상했다.
노후보는 자신은 후에 학창시절 백범 김구선생을 존경,「백범일지」를 여러번 탐독했다고 하는데 요즘도 연설때 백범어록을 가끔 인용하기도 한다.
경북중 은사인 이길우 경북여고 교장은 4학년 학적부에 『온순·충실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고 조항을 평가해놓고 있다. 편입첫해인 4학년때 석차가 2백24명중 1백2등이었는데 5학년때는 2백18명중 63등으로 뛴걸 보면 재사형이라기 보다는 꾸준히 집념을 갖고 노력해 뭔가 이뤄내는 끈기형에 가깝다고 보인다.
의사가 되고자 꿈꾸던 소년은 6·25를 만나 오늘의 그를 있게한 인우전변의 길로 들어선다.
1951년 18세의 중학 6학년때 모친의 반대에도 불구, 조부의 후원을 받고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원, 헌병학교 기간요원(9백명중 1등을해서 남게됨) 에서 이등중사까지 진급해 복무중 육사정규생 모집공고를 보고 육사에 응시했다.
삼촌은 전쟁이 끝난 후 의대에 진학하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그때 향학열을 어디가서도채울 수가 없었는데 진해는 안전한 곳이니까 배울 수가 있을뿐만 아니라 삼천에게 더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응시동기를 털어놓았다.
52년1월1일 육사에 입교한 그는 키가 15cm쯤 더 자라 키작다는 소리는 안듣게 된 외형적 변모외에도 전두환대통령을 만나 그이후의「운명적 동반관계」의 단서를 연다.
그는 군시절 소령때부터 전대통령등의 선두그룹에 이어2차로 진급했고 참모 총강수석보좌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보안사령관등의 보직을 전대통령으로부터 「인계」 받는 기연을 맺었으며 이 같은 양자간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12·12사태로 이어져 오늘의 대통령직 인계인수단계까지 발견한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육사시절은 「얌전한 소년」노태우를 장차 크게 바꾸는 운명의 맹아를 배태한 기간이었다.
육사시절 그는 럭비부에서 남다른 투지와 극기력을 보였고 운동에는 거의 만능의 재질을 보여 정구·수영등은 지금도 남다른 솜씨를 보일 정도다.
그런 한편 「톨스토이」소설과 홍사용의 감상적 시 및「헤르만·헤세」의 시에 심취, 그중 몇편은 지금도 줄줄 암송한다.
그는 그때도 여전히 동기생들의 구심적 존재는 아니었지만 4학년때 구대장생도를 하는등 지도력을 발휘해 소년기보다는 뚜렷한 존재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성격도 훨씬 적극성을 띠었다.
55년8월 상위권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 박정희소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제5사단에 배속되어 고박대통령의 지우를 얻는다. 그가 소령이던 62육사동기생 모임인 북극성회 회장으로서 동기생들을 대표해 5·16후 4대의혹등의 실정을 비판, 박국가재건 회의최고의장에게 낸 건의서 사건에서 하마터면 군복을 벗을 뻔했으나 이때 만난 인연으로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그는 경북중 1년후배이자 육사동기로 막역한 친구인 김복동씨 (예비역육군중장) 집을 육사시절부터 드나들다가 김씨의 누이 옥숙씨(52·경북여고졸)와 2년간 연애 끝에 59년 5월31일 혼인했다. 김씨의 둘째누이는 상공장관을 지낸 김진호씨의 부인이다.
그는 68년9월 맹호사단 재구 대대장(중령) 으로 파월, 전공을 세워 화랑 및 충무무공훈장을 연이어 받았으며 월남에서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모셨던 윤필용장군사건(73년)때 연루혐의를 받고 한때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생활은 「예술의 극치」 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기량이 발휘되고 평가받는 보람의 무대여서 다양한 구성원을 하나로 통합, 조화해 생명력있는 집단으로 만들기위해 「명령이 아닌 대화」 라는 지휘방침으로 소대장 때부터 우수부대를 양산해냈다.
그는 또 5·16직후 대위시절부터 방첩대 (당시 방첩대장이 정승화 전육참총장) 파견근무등으로 정치와 관련있는 경험을 쌓으면서 엘리트의 길을 달려왔다.
그러나 장군 노태우를 정치로 끌어넣어 한국현대사의 한가운데로 밀어넣은 결정적 사건은 두말할것없이 79년의12·12사태다. 휘하 전방 사단병력의 일부를 동원, 전두환보안사령관(당시)과 함께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 이튼날 수경사사령관이 됐으며 보안사령관을 거쳐 81년7월15일 대장으로 전역한 후 81년7월 외교·안보담당 제2정무장관에 취임하면서 정계전면에 얼굴을 내밀게되고 올림픽유치에도 중요한 추진역으로 참여했다. 이어 체육·내무장관과 올림픽 조직위원징등 요직을 거친다.
2·12총선의 야당돌풍에 따른 당개편때 전국구의원으로서 집권당대표위원에 취임,「제2인자」 가 된다.
87년 6월10일까지 「허세의 2인자」라는 세평이 나돌 만큼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특유의 버티기로 이겨냈다.
그때까지 그의 경륜·지도이념·정견·정치철학 내지는 이념에 관해 여백 상태인듯 했으나 6·29로 비로소 자기목소리를 결연히 내기 시작, 이번 선거를 통해 개혁적 민주론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한것으로 평가되며 앞으로 5년간 채워질 여백에 어떤 그림을 선명히 그릴지 관심의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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