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제주지검 A검사, "탄광촌에서 분연히 일어났다가 실패하는 내용의 '제르미날(에밀 졸라作)' 인상깊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의 세상만사

제주지검 청사 전경. 지검장·차장검사실은 3층이다. 오른쪽은 제주지검 청사 정문 앞 돌하르방. [조강수 기자]

제주지검 청사 전경. 지검장·차장검사실은 3층이다. 오른쪽은 제주지검 청사 정문 앞 돌하르방. [조강수 기자]

지난 1일 제주시의 한낮 최고 기온은 33도를 넘나들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휴대전화에 ‘폭염 계속. 주의 요망’이란 문자가 떴다. 택시기사는 “북(北)제주도에 한 달째 비가 안 오는데 이상고온 때문에 큰일”이라며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제주지검의 공기는 딴판이었다. 청사 전체에 냉기류가 흘렀다. 검사 임관 10여 년차의 형사부 여검사(이하 ‘A검사’)가 서열 1, 2위인 제주지검장(이석환 현 청주지검장)-차장검사(김한수)를 대검에 동시에 감찰 청구한 사건의 충격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제주지검, 여검사, 상명하복 문화 등의 키워드를 갖고 사건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봤다.

김수창 사건 이어 지휘부 감찰 청구 #“육지 검찰과 달리 자유롭고 과감” #A검사 “영장 접수 조직적 은폐” #김 차장검사 “오해·시스템 부재 탓” #직접 만난 A검사, 잠 못 자 창백 #윤웅걸 “상사 지시 서면 남길 것”

이날 제주지검 직원들은 A검사(42·사법연수원 34기)가 관련된 사건이나 검사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한테는 묻지 마세요” “입이 없습니다”를 연발하며 몸을 사렸다. 그럴 만했다. 검사가 소속 검찰청 지휘부의 결정에 반발해 공식 감찰을 요구하고 구체적인 의혹 내용을 검찰 게시판에 공개한 건 전례가 없다. 사실 2014년 1월 검찰청법이 개정되면서 검찰조직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삭제됐다. 무조건적 상명하복은 불합리하다는 거였다. 그때 구체적인 사건에서 상급자의 지휘·감독 정당성에 대한 검사의 이의제기권도 신설됐다. 그럼에도 수사 절차상의 이견은 대부분 내부적으로 해결돼 왔는데 이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지휘부의 소통 부재 및 관리 책임이 작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오전 9시30분에 열린 윤웅걸 신임 제주지검장의 취임식장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건 당사자인 김한수(51·연수원 24기) 차장검사와 A검사도 참석했지만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또 다른 당사자인 이석환(53·연수원 21기) 전 제주지검장은 전날 퇴임식을 마친 뒤 부임지로 떠나고 없었다.

윤웅걸 신임 제주지검장이 지난 1일 취임식에서 “영장 청구와 기소 때 이견이 발생하면 치열한 토론을 거쳐 그 결론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윤웅걸 신임 제주지검장이 지난 1일 취임식에서 “영장 청구와 기소 때 이견이 발생하면 치열한 토론을 거쳐 그 결론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제주지검에선 3년 전에도 상상 못할 대형 불상사가 있었다. 2014년 8월 김수창 당시 제주지검장은 공연음란 혐의가 인정돼 기소유예 처분과 함께 치료를 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검사들 사이에서 “제주지검에 한여름 납량 특집 같은 사건이 주기적으로 터지고 있다”는 귓속말이 번지고 있다. 검찰 고위 간부는 “제주지검은 부장검사나 평검사가 가장 근무하고 싶어 하는 검찰청”이라며 “다만 육지 검찰과 달리 멀리 객지에 떨어져 있다 보니 좀 더 자유로워지고 과감해지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A검사는 3000만원대 중개수수료 편취사건으로 B씨를 조사하던 중 카카오톡과 e메일 계정,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청구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다. 지난 6월 14일 오후 5시40분쯤 해당 영장청구서가 법원으로 넘어갔으나 김 차장검사는 곧바로 직원을 보내 회수했다. 기록을 다시 검토한 뒤 “e메일 등은 참고인으로부터 이미 제출받았고 더 필요하면 임의 제출받을 수 있으니 영장을 청구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법원 전산상에 등록됐던 영장청구서가 주임검사 몰래 회수됐다고 판단한 A검사가 다음 날 감찰을 청구하면서 사태가 커졌다.

특히 A검사는 지난달 27일 이프로스(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영장서류 접수 사실 조직적 은폐’를 비롯, ‘수사의 (조기) 종결 지시’ ‘이석환 지검장과 연수원 동기인 B씨 변호사에 대한 전관예우’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 차장검사는 “의혹들은 전부 사실이 아니며 이번 사태는 오해와 시스템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양측 주장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차장검사의 도장이 찍힌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에 착오로 접수했다가 회수하고도 주임검사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당일 A검사를 만난 건 운이 좋아서였다. 광주고검의 감찰이 진행 중이라서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취재 면담 요청을 하자 의외로 수락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A검사가 법무부 훈령인 ‘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공보 준칙’ 사본을 내밀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의미 같았다. 이윽고 A검사가 질문을 쏟아냈다. “논설위원 되기가 어렵지 않나요?” “책 쓰신 것 있나요? 제가 활자 중독이라서. 책만 좋아해요.”

누가 기자고 누가 검사인지 헷갈렸다. ‘최상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곧 역질문에 나섰다.

기억나는 책은 뭐죠?
“최근에 인상 깊었던 건 『제르미날』(에밀 졸라의 1885년 작)과 『의심스러운 싸움 』(존 스타인벡의 1936년 작)입니다. 오래된 책이죠. 『제르미날』은 프랑스 탄광촌에서 광부로 취직한 남자가 열악한 환경에 격분해 파업을 선동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안 돼 좌절합니다. 둘 다 파업이 공통점이고 분연히 일어났다가 실패하는 과정이….”
두 책 내용과 검사님 생활이 비슷한 듯한데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사실 그 책들이 나옴으로써 굉장히 큰 사회적 반향이 일어났어요. 아프고 난 다음부터 활자 중독이 된 것 같아요.”
아프셨나요? 몇 년 전에 큰 수술을 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네. 완치가 안 돼 치료받고 있어요. 내일부터 병가 갑니다.”

자신이 감찰을 청구한 김 차장검사와 같은 청사에서 지내느라 불편할 것 같다고 묻자 “차장님 착한 분인 거 아시죠?”라고 하고는 말을 멈췄다. 얼굴에 복잡다단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A검사는 “요즘 잠을 통 자지 못해 얼굴이 창백해졌다.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 내 사건사고의 유형을 들여다보면 묘한 특징이 있다. 남자 검사들에 의한 사건사고는 대개 성범죄나 뇌물 등으로 형사 처벌 대상이다. 반면 여검사들은 사건 처리 과정에서 상사와 부딪히며 절차적 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 고검장급 간부는 “검찰 출신 국회 법사위원장이 민원을 하려고 일선 검찰청의 여검사에게 전화해 ‘저 법사위원장입니다’고 했더니 여검사가 ‘그런데요?’라고 했단다. 여검사들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세상이, 관점이, 문화가 바뀌고 있고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지방검찰청 역대 지검장 [조강수 기자]

제주지방검찰청 역대 지검장 [조강수 기자]

광주고검의 최종 감찰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번 사태는 또다시 요동칠 공산이 크다. 윤웅걸 지검장은 A검사 사건의 재발 방지대책과 관련해 “앞으로 사건 처리와 관련한 의사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겠다. 상급자의 지시를 반드시 서면으로 남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검찰에 대한 신뢰는 해저 구만리에 가있다. 검찰이 살길은 진정성 있는 실천뿐이다. 제주지검 사태가 주는 교훈 아닐까.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