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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 녹이는 시원한 음악…북유럽 감성에 녹아든 지산 밸리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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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표현한 영상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시규어 로스. [사진 CJ E&M]

은하수를 표현한 영상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시규어 로스. [사진 CJ E&M]

‘여름=록페’라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전 세계적으로 대세인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자리를 차지하고, 봄ㆍ가을에도 주말마다 각종 페스티벌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더이상 ‘로큰롤(rock' n’ roll)’을 외치기 위해 한여름에 록페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8~30일 경기 이천에서 열린 국내 최대 규모의 록 페스티벌인 지산 밸리록도 예외는 아니었다.

28~30일 지산 밸리록 뮤직앤아츠 페스티벌서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가 헤드라이너로 #서늘한 풍경화 선사하는 싱어송라이터 아우스게일 #덴마크 음유시인 루카스 그레이엄 등 다양한 매력

지산 밸리록의 대대적인 변화는 지난해부터 감지됐다.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로 이름을 바꾸고, 음악적 장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은 물론 현대미술을 접목해 보고 듣는 즐거움을 배가한 것이다. 겨울철 스키장으로 사용되는 슬로프에 설치된 윤사비 작가의 ‘프리즘’이나 출연 아티스트의 사진을 3차원 조형물로 재구성한 권오상 작가의 ‘뉴 스트럭쳐’ 등 공연장 곳곳에 작품이 설치돼 있다.

29일 지산 밸리록 뮤직앤아츠 페스티벌에서 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시규어 로스의 욘시.[사진 CJ E&M]

29일 지산 밸리록 뮤직앤아츠 페스티벌에서 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시규어 로스의 욘시.[사진 CJ E&M]

메인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헤드라이너 선정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미국 EDM 프로젝트 그룹 메이저 레이저(28일)나 영국의 가상밴드 고릴라즈(30일)는 차치하더라도 사실상 가장 많은 관객이 모이는 둘째 날을 아이슬란드의 시규어 로스에게 맡긴 것은 다소 과감한 선택이다. 2012년 지산을 뜨겁게 달궜던 라디오헤드가 “우리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밴드”로 꼽고, 아이슬란드 국보급 밴드로 추앙받는 20년 차 관록이 빛나는 그룹이지만, 보컬 욘시가 만든 언어인 ‘희망어’로 노래하는 낯섦이 전제된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에메랄드빛 은하수를 풀어놓은 듯한 영상 위로 ‘사이로퍼(Saeglopur)’를 들려주며 2만5000명의 관객을 다른 시공간으로 인도함으로써 기우를 잠재웠다. 욘시가 활로 기타를 켜는 선율에 맞춰 관객들은 우주 한가운데 떨어진 적막함을 맛보기도 하고, 아이슬란드 고원 어딘가에서 오로라를 보는 듯한 황홀함에 취하기도 했다. 두 손 들고 방방 뛰는 것이 록의 전부가 아님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서정민갑 음악평론가는 “어두운 야외에서 들으니 몽환적인 느낌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며 “환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이라고 평했다.

아이슬란드 대표 뮤지션의 계보를 잇는 싱어송라이터 아우스게일. 아이슬라드 풍광을 떠오르게 하지만 시규어 로스와는 또다른 공허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사진 CJ E&M]

아이슬란드 대표 뮤지션의 계보를 잇는 싱어송라이터 아우스게일. 아이슬라드 풍광을 떠오르게 하지만 시규어 로스와는 또다른 공허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사진 CJ E&M]

2012년 나란히 데뷔한 아이슬란드 싱어송라이터 아우스게일과 보컬 루카스를 프론트맨으로 내세운 덴마크 3인조 팝밴드 루카스 그레이엄은 남다른 감성을 자극하는 북유럽 뮤지션의 계보를 이을 만한 무대를 선보였다. 데뷔 앨범 ‘인 더 사일런스(In The Silence)’로 아이슬란드 국민 10명 중 1명은 가지고 있는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아우스게일은 서늘한 목소리로 무더위를 식혔다.

공연 전 만난 아우스게일은 “다른 곳에서는 절대 들어보지 못한 독창적인 음악이 아이슬란드 음악의 매력”이라며 “아이슬란드 신화 등 문학작품에도 자연에 관한 메타포가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최근 발매된 2집에도 일몰 후 잔광을 뜻하는 타이틀곡 ‘애프터글로우(Afterglow)’나 1집 수록곡 ‘오션(Ocean·대양)’, ‘프로스트(Frost·서리)’ 등 자연을 품은 노래들이 많다. 시인인 아버지와 기타리스트 형이 함께 작사한 노랫말이 운치를 더한다.

덴마크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루카스 그레이엄. 28일 지산 밸리록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CJ E&M]

덴마크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루카스 그레이엄. 28일 지산 밸리록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CJ E&M]

아우스게일이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밤의 뮤지션이라면 루카스 그레이엄은 통통 튀는 밝은 낮의 매력을 뽐냈다. 첫 내한한 이들은 “몇 년 전 우리 공연을 보기 위해 독일까지 온 한국 팬을 위해 이번엔 우리가 열네 시간을 날아왔는데 이렇게 더울 줄은 미처 몰랐다”며 첫곡부터 웃통을 벗어제꼈다. “사진 찍게 손 좀 계속 흔들어주겠냐”고 너스레를 떨던 그는 마치 뮤지컬 같은 무대로 최고의 밤을 선사했다.

영국 UK 싱글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한 ‘7 이어스(7 Years)’를 비롯 ‘퓨너럴(Funeral)’ ‘해피 홈(Happy Home)’ 등을 선보일 땐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주로 “엄마가 말하기를(Mama said)”로 시작해 자전적 경험을 담은 그의 가사는 북유럽판 ‘서른 즈음에’로 불릴 정도로 나의 7살, 20살을 회상하게 하는 울컥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덴마크 음유시인’이라 칭송되는 이유기도 하다.

지산 밸리록을 찾은 관객들과 어우러지는 권오상 작가의 '뉴 스트럭쳐'. [사진 CJ E&M]

지산 밸리록을 찾은 관객들과 어우러지는 권오상 작가의 '뉴 스트럭쳐'. [사진 CJ E&M]

패션과 인테리어 등 라이프스타일에 이어 음악에도 불고 있는 북유럽 바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마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음악과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공간감 덕분이다. 박은석 음악평론가는 “영미권 주류 대중음악에서 찾을 수 없는 정서를 전달해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며 “음악을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움을 찾는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북유럽은 국가마다 노르웨이는 데스메탈, 스웨덴은 EDM 등 음악적 토양이 매우 다채롭다”며 “페스티벌 자체가 청년 레저산업이 된 상황에서 더 다양한 음악을 찾아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CJ E&M 측은 “지난해 헤드라이너로 선 러시아 DJ 제드(ZEDD)의 무대 반응을 보고 보다 다양한 음악으로 구성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앞으로도 장르의 다변화와 내실을 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천=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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