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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만화 필요한 이유…"명상하듯 좀 더 천천히 살자는 다짐"

중앙일보

입력

그래픽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이 24일 서울 계동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본지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그래픽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이 24일 서울 계동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본지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집안에 작은 마당과 나무가 있는 풍경이 참 예뻐요. 밀어서 여닫는 문도 이국적이고. 침대 없이 얇은 담요(요와 이불)만 깔고 자게 될 오늘 밤이 너무 기대됩니다.”

미국의 천재 만화가 크레이그 톰슨 한국 첫 내한 #자전적 스토리 『담요』로 만화계 오스카상 수상 #이슬람 문화 다룬 『하비비』역시 걸작으로 꼽혀 #단순하고 사색적인 그림으로 독자들에게 '쉼표' 제공 #"다음 작품 주제는 인삼, 한국 이야기 기대하시길"

지난 24일 서울 계동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크레이그 톰슨(42)은 미국이 자랑하는 천재 만화가다. 스물여덟 살인 2003년 발표한 그래픽노블 『담요』는 이듬해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하비상을 비롯해 아이스너상, 이그나츠상, 프랑스만화비평가협회 ACBD상 등 만화계의 주요 상들을 석권했다. 타임이 선정한 ‘2005년 역대 최고의 그래픽노블 10권’에도 선정됐다.

'담요'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담요'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학비가 없어 끝내 예술학교 졸업장을 못 받은 젊은 만화가가 온갖 궂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경야독한 결과다. 책 계약 당시 무명작가가 받은 선 인세는 겨우 300달러였다. 이제 형편이 좀 좋아졌나 묻자 톰슨은 “겨우 만화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라며 “여전히 젊은 작가들이 만화만 그려서는 먹기 힘든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노블은 문학성·예술성을 겸비한 만화 장르다. 개성 있는 그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탄탄히 맞물려야 한다. 『담요』는 미국 위스콘신주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톰슨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엄격한 부모와 복음주의 기독교 때문에 숨이 막혔던 소년에게 첫눈처럼 다가온 첫사랑과 서늘한 성장통을 그렸다. 언뜻 낭만적으로만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철학적 여운을 남기는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담요’가 가진 중의성 때문이다. 톰슨에 따르면 ‘담요’는 “따뜻함, 안전함을 상징하면서도 복잡하고 추한 문제점·갈등 등을 덮어버리고 감추기 위한 도구”다.

'하비비'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하비비'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담요』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하비비』 역시 그래픽노블의 걸작으로 꼽힌다. 겉모습은 두 남녀의 러브 판타지이지만 코란과 성경, 환경보호와 산업화, 사랑과 철학 사이를 오가며 극단주의자들을 향해 정치적·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톰슨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사실 종교의 문제가 아니고 경제(자본주의) 시스템이 파생시킨 불평등의 문제”라고 했다. 작가가 일일이 손으로 쓰고 그려 넣은 아랍 글자와 기하학적 문양들을 보는 재미는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담요』 홍보를 위해 모로코에 갔다가 아름다운 글씨에 반해서 이걸 그려 넣을 만한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죠.”

'만화가의 여행'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만화가의 여행' 표지 앞뒷면. [사진 미메시스]

톰슨은 젊지만 아날로그 방식을 좋아한다. 3개월에 걸쳐 모로코·프랑스·스페인 홍보여행을 다니면서 겪은 경험·감상을 기록한 『만화가의 여행』(2004)에 콕콕 박힌 수많은 풍경과 캐릭터는 모두 그의 기억으로 완성된 것들이다. 여행 당시 그는 아예 카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휴대폰도 갖고 잊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꿋꿋이 종이와 펜만으로 그림을 그린다.

“더욱더 천천히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거예요. 요즘처럼 ‘사진 찍기’에 중독된 SNS 시대일수록, 마치 명상을 하듯 특별한 장소·시간·대상과 충분히 소통하고 관계를 맺기 위해 정성을 들이는 거죠. 아직도 어떤 나라들에선 사진을 찍히면 영혼을 뺏긴다고 믿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을 찍는 행위는 폭력이고, 과시욕을 위한 사진 찍기는 영혼이 없는 행위죠.”

'담요' 본문 그림. [사진 미메시스]

'담요' 본문 그림. [사진 미메시스]

톰슨의 그림은 독자들에게도 천천히 깊게 사유하며 살 것을 권한다. 그림이 들어앉은 공간에는 여유가 많고, 스토리 진행도 숨 가쁘지 않다. 한 컷으로 한 페이지를 채우는 일도 흔하다. 톰슨의 그래픽노블이 ‘어른들을 위한 만화’로 불리는 이유이자,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두툼살벌한 두께를 갖는 이유다.

'담요' 본문 그림. [사진 미메시스]

'담요' 본문 그림. [사진 미메시스]

지난 23일 폐막한 제20회 부천국제만화축제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찾은 그는 이번 여행에 동생 필과 동행했다. 어린 시절 서로의 몸에 오줌 싸기 경쟁을 벌였던 바로 그 동생과 다음 작품을 함께 준비하고 있다. 필도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림 솜씨를 타고 났다. 두 사람은 지금 ‘인삼’을 주제로 이야기 구상 중이다.

“위스콘신은 미국 내에서 ‘인삼의 고장’으로 유명해요. 우리는 6살, 9살 때 인삼밭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어요. 인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의학에선 서양의학과 달리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모두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는 것도 흥미로워서 인삼에 대한 집중 연구를 시작했죠.”

동생 필의 팔뚝에는 커다란 인삼 문신도 새겨져 있다. 지난해 친구에게 신장을 이식해주고 새긴 것이다. 필은 “신장 하나를 친구에게 주고 인삼 하나를 얻었다”며 웃었다.

그래픽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과 그의 동생 필, 두 사람은 '인삼'을 주제로 한 다음 작품을 함께 구상 중이다. 필의 오른쪽 팔뚝에는 인삼 문신도 새겨져 있다. 오종택 기자

그래픽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과 그의 동생 필, 두 사람은 '인삼'을 주제로 한 다음 작품을 함께 구상 중이다. 필의 오른쪽 팔뚝에는 인삼 문신도 새겨져 있다. 오종택 기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으로 인삼이 든 삼계탕을 먹었다는 두 사람은 다음날 금산으로 직접 내려가 인삼축제도 둘러봤다. 9월에 있을 위스콘신 인삼 페스티벌에도 참가한 후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쓰고, 겨울부터 그림 스케치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다는 두 사람의 새 작품 속에서 한국과 인삼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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