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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추억] '하나회와 악연' 이승에 두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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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화해할 겁니까."

생전에 기자는 그에게 묻곤 했다. 그러면 강창성씨(사진)는 "화해는 무슨…. 전씨가 사과해야지"라고 했다.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않았다. 강씨는 정규 육사 출신 사조직인 '하나회'의 천적(天敵)이었다. 그런 강씨가 1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79세. 전두환-강창성 싸움의 해결은 이제 천상(天上)으로 넘어갔다.

강씨가 권부에 등장한 것은 1973년 8월 '윤필용 사건' 때였다. 육사 8기생인 강씨는 경기도 포천 태생이다. 광복 직후 포천은 38도선 이북이어서 강씨는 군내 이북파 리더였으며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같은 8기생인 윤필용 수경사령관은 4년제 육사생도 출신인 11기의 전두환.노태우 그룹을 이끄는 하나회 대부이자 영남파 수장이었다. 윤 장군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후계자" 운운하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철퇴를 맞았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강 사령관은 사조직 제거라는 명분을 걸고 하나회를 공격했다. 그러나 하나회의 최종 후견인은 박 대통령이었다. 전.노는 구속을 면했다. 강 장군은 3관구 사령관을 거쳐 76년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80년 초까지 초대 해운항만청장을 지냈다.

2라운드는 80년 봄이었다. 하나회의 신군부가 권력을 잡았다. 강씨는 생전 "청장에서 물러난 후 보안사가 내 주변을 뒤졌다.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돼 2년여 동안 징역을 살았다. 신군부의 보복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이라며 젊은 죄수들과 함께 봉체조에 원산폭격(체벌의 일종)을 시켰다. 74kg이던 몸무게가 54kg으로 줄고 당뇨까지 얻었다"고 분개했다.

3라운드는 88년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쫓겨갔다. 강씨는 91년 하나회 문제를 다룬 '일본 및 한국의 군벌정치'라는 책을 펴낸 뒤 정계로 뛰어들었다.

92년 박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DJ(김대중)의 품으로 들어가 14대 전국구의원(민주당)을 지냈다. 당내 12.12 진상조사위와 5공.6공 부정부패조사위를 이끌었다. 전.노에 대한 반격이었다. 97년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쳐지면서 강씨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위해 뛰었다. 대선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고 2000년엔 16대 전국구(한나라당)로 재선됐다.

신군부 인사들은 강씨의 주장을 일축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은 15일 "우리는 강씨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교도소에서 강씨가 주장하는 그런 교육은 없었다. 교도소 측에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씨의 유족은 부인 윤봉죽(75)씨와 국민대 교수인 장남 재형씨 등 2남3녀. 발인 18일 오전 8시.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이다. (02)3010-2292

김진 정치전문기자

*** 바로잡습니다

2월 16일자 27면 '삶과 추억'은 14일 별세한 강창성 전 국회의원에 대해 "육사 8기생인 강씨는 경기도 포천 태생이다. 광복 직후 포천은 38도선 이북이어서 강씨는 군내 이북파 리더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포천의 14개 읍.면 중 광복 직후에 38도선 이북이거나 일부 지역이 38선에 걸쳐 있던 곳은 4개 읍.면이어서 바로잡습니다. 포천 전체가 이북이었던 것처럼 묘사된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문용 재경포천시민회 회장은 "강 전 의원이 태어난 신북면은 38도선 이남이어서 이북파란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 바로잡습니다

 3년 전인 2006년 2월 14일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7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사령관이던 1973년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소위 ‘역린(逆鱗)’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군 실세였던 윤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후계자” 운운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철퇴를 맞은 사건입니다. 강 보안사령관은 윤 장군이 후원하던 육사 사조직 하나회도 수사했습니다. 80년대 초 하나회 리더인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는 강씨를 투옥했습니다.

중앙일보는 2006년 2월 16일자 27면 ‘삶과 추억’ 기사에서 강씨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강씨의 생전 증언을 소개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이라며 젊은 죄수들과 함께 봉체조에 원산폭격(체벌의 일종)을 시켰다. 74kg이던 몸무게가 54kg으로 줄고 당뇨까지 얻었다”는 내용입니다. 중앙일보는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5공 초기 핵심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의 반론도 실었습니다. “우리는 강씨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교도소에서 강씨가 주장하는 그런 교육은 없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후 강씨의 수감생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허씨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강씨의 피해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으로 투옥됐던 이신범 전 의원은 82년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강씨와 같이 지냈습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교도소에선 일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순화교육이란 걸 시켰다. 강씨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눈 위에서 무거운 전봇대를 굴리는 등 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는 나에게 심한 고통과 신군부에 대한 격노를 토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전 의원은 “교도관들은 ‘강씨에게 순화교육을 시키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보고하라고 청와대에서 지시했다’고 내게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중앙일보는 강씨의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허화평씨의 주장에 상처를 받은 강씨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중앙일보는 당시 기사에서 “광복 직후 포천은 38도선 이북이어서 (포천 태생인) 강씨는 군내 이북파 리더였다”고 적었습니다. 강씨가 태어난 지역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으로 이남이어서 이북파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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