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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배인구의 이상가족(10) 사실혼 남편 떠나니 나가라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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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누님은 1남 1녀의 자녀를 둔 홀아비와 결혼했습니다. 가족들은 반대했지만, 누님은 그 집에 들어가 부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누님은 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았고, 전처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보며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형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누나를 내쫓은 겁니다. 알고 보니 누님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죠. 애석한 마음은 접어 두고 누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없을까요.

[중앙포토]

[중앙포토]

안녕하십니까. 제게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합니다. 얼굴은 그리 곱지 않아도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 누님이 지금 몸과 마음에 병이 생겨 누워 있습니다.

사실혼 관계 남편이 갑자기 사망 #사망 후 아이들이 집에서 쫓아내 #재산분할 권리 상실로 구제 못 받아

누님은 30대 젊은 나이에 아들과 딸이 있는 홀아비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를 잃고 아이들을 건사하기 힘든 자형이 딱해 보였는지, 진짜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누님은 우리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형 집에 들어가 어린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누님은 초혼이었지만 자형과 아이를 갖지도 않았습니다. 혹시 친 아이가 생기면 전처소생 자식들에게 소홀해질까 그랬는지 저도 누님의 속을 알 수 없지만, 누님은 늘 아이들이 예쁘다고 이 아이들 때문에 살아갈 힘이 생긴다며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봤습니다. 자형이 이런 누님을 많이 사랑하고 의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살림을 늘려가면서도 누님 이름으로 무엇 하나 해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갑자기 자형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장례를 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49재를 마치고 나서였습니다. 아직 20대인 조카들이 누님을 자형과 같이 살던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알고 보니 누님은 자형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신 겁니다.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 아이들의 결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결혼하고 나면 그때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엄마라고 부르며 같이 살았던 가족인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떻게 엄마를 나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아들과 딸이 있는 홀아비와 살림을 살겠다고 했을 때 죽기살기로 말렸어야 했습니다. 그때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제작 조민아]

[제작 조민아]

배인구 변호사가 답합니다

혼인공동생활의 실체가 있는데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사실혼이라고 하죠. 사례자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누님 부부는 오랜 기간 아이를 키우고 같이 사셨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니 사실혼 부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법은 법률혼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혼의 경우에도 비슷한 효력을 인정해주는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실혼 배우자도 사실혼이 파탄된 경우 재산분할을 청구할 권한이 있고, 국가유공자 등의 유족연금수급권도 있습니다. 임차인지위를 승계할 수도 있구요. 다만 예외적으로 상속을 받을 수는 없답니다.

만약 사례자분 자형이 쓰러졌을 때 누님이 가정법원에 사실혼파탄을 주장하면서 재산분할을 청구했다면 상당한 재산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상속분보다 많이 받으셨을 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랑하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재산분할을 청구할 기회를 놓친 셈이죠. 사망으로 인해 사실혼관계가 종료된 경우에는 재산분할 청구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은 계속 있었지만 헌법재판소는 이것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법률적으로 사실혼 배우자에게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상속인인지 여부를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외형적으로는 사실혼 배우자인지 그저 동거하는 동거인인지 잘 모르고, 상속인들 사이에서도 사실혼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등 다툼의 여지도 있을 수 있겠죠.

우리 민법은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그 즉시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재산상 권리의무를 상속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때문에 누가 상속인인지 모호한 영역을 남겨 두는 것이 어렵습니다. 법률혼 배우자만 상속인이라고 하면 이처럼 상속인인지 여부를 다투는 분쟁을 방지하고 상속으로 인한 법률관계를 조속히 확정시킬 수 있는 것이죠.

저 역시 법의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나 사례자분의 누님과 같은 경우 상속재산에 많은 기여를 했을텐데 그 부분을 인정받지 못하는 점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상속제도가 전반적으로 재정비되어 사례자분의 누님과 같은 경우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길 희망합니다.

그 조카들이 많이 야속하네요.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랬답니다.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누님이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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