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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발병 난다’ 번역하다 나섰다, 아리랑 가락 따라 30년 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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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진용선 정선 아리랑박물관장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로 나온 진용선 관장. 오대산과 태백산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는 남한강의 출발점이다. 그에게 ‘정선아리랑’ 한 가락을 청했다. “전 소리를 잘 못해요. 아리랑을 맛나게 부르려면 일흔은 돼야 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와야 하거든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로 나온 진용선 관장. 오대산과 태백산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는 남한강의 출발점이다. 그에게 ‘정선아리랑’ 한 가락을 청했다. “전 소리를 잘 못해요. 아리랑을 맛나게 부르려면 일흔은 돼야 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와야 하거든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문제는 ‘발병’이었다. 독일어로 ‘Fußsch- merzen’으로 옮겼지만 정작 원어민 교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33년 전 대학생 때 얘기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즉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읊조리는 ‘아리랑’의 한 구절이다. 독일어를 잘한다고 자부하던 학생은 역부족을 느꼈다. 아리랑 가사에 깊게 깔린 정서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자료 9000여점 수집 #한민족 이주 경로 110차례 다녀와 #해외 동포 2000명 넘게 취재·채록 #실크로드 2.5배 아리랑 로드 #고향 떠난 사람들 눈물 어린 노래 #지구촌 곳곳 새로운 꽃으로 피어 #끝나지 않은 여정 #미국·멕시코·쿠바 자료 수집 채비 #세계인 함께하는 노래 되게 할 것

하지만 그게 ‘길’이 될지는 몰랐다. 이른바 ‘아리랑 로드’, 지난 세기 한국인의 고단한 해외이주 경로를 30년 가까이 좇아가는 게 운명이 될 줄이야. 진용선(54) 정선아리랑박물관장 얘기다. 인하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교수를 꿈꾸었던 그는 삶의 행로를 180도 바꾸었다. 아리랑 가락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또 국경을 넘으며 20세기 한국인의 또 다른 얼굴을 그려 왔다. 최근 낸 『아리랑 로드』는 ‘아리랑 박사’로 통하는 그만의 중간 보고서다. 그를 만나러 강원도 정선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 아리랑박물관을 찾아갔다. 지난해 5월 개관한 아리랑박물관에는 진 관장이 모아 온 음반·악보·책자·영상 등 관련 자료 5000여 점이 지역·시기별로 정리돼 있다.

한 사람이 이 많은 것을 모았다.
“전시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9000여 점이 된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하나 수집했다. 아리랑 붐이 일기 전부터 해 온 일이라 큰돈이 들진 않았다. 5만원, 10만원씩 주고 산 게 많다. 지금은 값이 뛴 것도 상당수 있지만 말이다.”
독일문학을 전공했는데.
“고교(춘천 강원고) 때부터 독일 시를 좋아했다. ‘의자’의 조병화(1921~2003) 시인을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분께서 인하대 문과대학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85년 시 전문지 『심상』 신인상에 당선되고, 동시에 『시문학』에 추천받으며 등단했다.”
1954년 벨기에 가수 에스테렐라의 ‘아리랑’ 음반과 악보. ‘아리랑’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로 퍼졌다.

1954년 벨기에 가수 에스테렐라의 ‘아리랑’ 음반과 악보. ‘아리랑’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로 퍼졌다.

그런데 왜 아리랑에 빠졌나.
“인생이 확 바뀐 거다. 독일어 작문 시간 ‘발병 난다’ 번역이 계기가 됐다. 김소월·박용래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고, 독일 젊은 시인들 작품도 한국어로 옮기면서 시의 운율에 재미를 붙였다. 우리 민요를 대표하는 아리랑 선율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부터 독일어 통역, 토플 강사를 하며 아리랑 연구에 필요한 종잣돈을 모았다.”
91년 아예 고향 정선에 내려왔다.
“독일 문학잡지 ‘악젠트’, 시사주간지 ‘슈피겔’ 등에서 문화연구 분야가 뜬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에도 비슷한 학문이 열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게 제겐 ‘아리랑학’이었다. 8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도 불린 아리랑 아닌가. 석탄공사 함백광업소에 근무하던 아버지께서 실망이 크셨다. 기껏 대학에 보냈더니 촌로들이 작대기 들고 부르던 아리랑에 매달리겠다고 했으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다.
“당시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정선아리랑 가사집 정도였다. 귀향 직후 아라리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그해 첫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출마를 하려는, 정치를 하려는 건 아닌지 오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유일한 무기는 침묵이었다. 열심히 해서 결과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아리랑’을 녹음하는 진 관장.

지난해 6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아리랑’을 녹음하는 진 관장.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나.
“녹음기 들고, 수첩 펼치며 정선 일대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골짜기 골짜기 안 간 곳이 없다. 정선 9개 읍·면 지명 유래 책도 낼 정도였다. 정선 어르신만 700여 명 만났다. 그 전까지 정선아리랑 가사는 400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4년 발간한 『정선아리랑 가사사전』에 무려 5500여 수를 싣게 됐다. 아우라지부터 남한강 물길을 쭉 따라가며 채록했다. 아리랑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아리랑 로드, 명칭이 흥미로운데.
“조사에 속도를 붙이면서 중국에 있는 조선족,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을 주목하게 됐다. 미국·일본 말고도 수많은 한국 동포가 있었다. ‘그들은 왜 그곳까지 흘러갔을까’ 궁금증이 커졌다. 92년 한·중 수교 직후 옌볜조선족자치구를 방문했다. 책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만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지금까지 중국만 41차례 다녀왔다. 이후 연해주·일본·사할린·중앙아시아·러시아·하와이 등으로 발길을 넓혀 왔다.”
정말 많은 사람을 마주쳤겠다.
“연말께면 여권 4개를 다 쓸 것 같다. 여태껏 외국에만 110번 다녀왔다. 물론 다 아리랑 관련이다. 해외동포만 2000명 넘게 취재했다. 국내를 포함하면 3000명 가까이 된다. 지난 30년 동안 카메라 7대, 녹음기 6대를 사용했다. 1~2시간짜리 녹음테이프가 400개(녹음파일 제외), 깨알같이 적은 취재노트가 76권에 이른다. 그것들을 정리해 지역별 연구서도 냈다. 『아리랑 로드』는 그 축약판이다. 9월 말께 전시도 열 계획이다.”
정선 아리랑박물관 풍경.

정선 아리랑박물관 풍경.

가난과 고통의 한민족 자화상인가.
“한마디로 디아스포라(이산)의 음악이다. 나라가 잘살았으면 그들이 떠났겠는가. 1860년 이후 밥과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넌 이들을 대하며 눈물도 꽤나 흘렸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실크로드’보다 더 길다. 지도에 실을 대고 일일이 재 보니 아리랑 로드가 실크로드의 2.5배 정도 됐다. 지금은 되레 그들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새로운 활력을 찾는다.”
피부에 안 와 닿는다. 합리화 아닐까.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예컨대 올해가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년이 되는 해다. 슬픔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막상 현지 동포들은 ‘더 큰 세상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불평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강제이주가 없었다면 더 넓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는 거다. 그 중심에 아리랑이 있다. 세대·지역별로 새 노래를 만들며 뿌리를 내려 왔다. 그게 노래의 힘일 게다.”
아리랑의 미래를 본다는 뜻인가.
“아리랑은 집 떠난 이들의 옷깃에 묻어간 꽃씨와 같다. 지구촌 곳곳에 새로운 꽃을 피워냈다. 전통 아리랑만 아리랑이 아니다. 동포 3, 4세들이 현대풍으로 빚은 노래도 아리랑이다. 카자흐스탄 음악가 한야콥 선생은 ‘소비에트 재즈’라고 정의할 정도다. 우리도 이제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때다. 6·25 이후 서양 음악인도 아리랑 멜로디를 수없이 빌려 썼다. 한국의 사랑노래로 받아들였다. 폴 모리아 악단의 ‘아리랑’ 앨범이 대표적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겠다.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가 됐다. ‘우리 것이 좋다’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가 공유하는 노래가 되도록 터전을 닦아야 한다. 아리랑 독립영화·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 제겐 필드(현장)가 스승이다. 아직 못 간 곳도 있다. 미국·멕시코·쿠바다. 내일이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S BOX] 발표한 아리랑 저서만 54권 … 아내와 아들 도움 받아

“저희는 가내수공업이라고 부릅니다. 내용 정리부터 편집까지 가족들이 모두 함께하죠.”

진용선 관장은 “지금까지 책 54권을 냈다”고 했다. 무엇보다 분량이 놀랍다. 1993년 『정선아라리, 그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부터 최근작 『아리랑 로드』까지 아리랑의 안팎을 두루 훑었다. 모두 철저한 현장조사 결과물이다.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할까. 진 소장에게는 조력자 두 명이 있다. 아내 배경숙씨와 아들 하림군이다. 10여 년 전부터 가족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 가운데 절반가량이 그들의 손을 거쳤다. 비유컨대 ‘3인(人)1각(脚)’ 게임이다.

“아들이 1분에 한글 900타를 칩니다. 아들이 녹음테이프를 일단 글로 풀면, 아내가 교정을 봅니다. 아내는 3년 전부터 답사에도 동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마지막으로 다시 살펴보죠. 사투리·외국어 등을 꼼꼼히 점검합니다.”

이쯤되면 대단한 ‘부창부수(夫唱婦隨)’요 ‘부창자수(父唱子隨)’다. “혼자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야 스스로 좋아서 여기저기 쏘다녔지만 아들에게는 미안할 뿐이죠. 자료 조사, 유물 구입 등을 이유로 어려서부터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거든요. 이제라도 잘해주려고 합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고요.”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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