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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 한국인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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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뭐든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경험은 늘고 호기심은 줄기 때문이다. 여행도 딱 그렇다. 경험 많은 여행자일수록 단순히 유명 관광지 앞에서 인증샷 하나 찍는 '확인 여행'에선 별다른 감흥을 못느낀다. 그보다는 오히려 잘 몰랐기에 더 알고 싶고 궁금해지는 곳으로 떠나는 '발견 여행'에 더 끌린다. 일본의 4개 주요 섬 가운데 가장 작고 낙후된 섬 시코쿠(四國)는 그런 노련한 여행자에게 더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의 정원문화재 가운데 가장 넓다는 시코쿠 가가와현 다카마쓰에 있는 리쓰린 공원. 상투적이지만 "그림 같다"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일본의 정원문화재 가운데 가장 넓다는 시코쿠 가가와현 다카마쓰에 있는 리쓰린 공원. 상투적이지만 "그림 같다"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시코쿠는 도쿄나 쿄토 등 혼슈의 대도시들뿐 아니라 북단 홋카이도(北海道)나 남단 규슈(九州)의 여느 지역과 비교해봐도 한국인에게 낯선 곳이다. 비록 짧은 일정이고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닌 7월초이긴 했지만 다니면서 단 한번도 한국인과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다.
황폐한 섬마을 전체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 세계적 명소로 거듭난 나오시마(直島) 덕분에 최근 몇년새 시코쿠 가가와현의 현청소재지인 다카마쓰(高松)가 꽤 이름을 알리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나오시마라는 뚜렷한 목적지가 있기에 다카마쓰 국제공항에 내려 배 타고 나오시마 들렀다가 다카마쓰로 다시 나와 사누키 우동 한 그릇 먹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천편일률적인 일정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카마쓰를 '찍고' 돌아오기엔 아쉽다. 다카마쓰는 물론이요, 인근 도쿠시마 현의 나루토 등 알면 알수록 발견의 재미를 주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시코쿠. 가가와·도쿠시마·고치·에히메 4개 현으로 이뤄져 있다. 

시코쿠. 가가와·도쿠시마·고치·에히메 4개 현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이야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나 역시 2015년초 처음 다카마쓰에 갔을 땐 오로지 나오시마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오시마가 워낙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 이상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나오시마의 매력에 압도되어 다카마쓰엔 눈길도 잘 가지 않았다. '다카마쓰가 뭐 별 건가, 사누키 우동의 고향이라니 우동 맛 한번 보면 그만이지' 싶었다. 항구에서 가까운 일본 특별명승지라는 리쓰린공원(栗林公園)조차 아름답긴 했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진 않았다.

'리쓰린 공원에 잘 오셨습니다'란 문구를 쓴 부채를 든 한국어 자원봉사자. 한국어가 조금 서툴긴 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았다. 

'리쓰린 공원에 잘 오셨습니다'란 문구를 쓴 부채를 든 한국어 자원봉사자. 한국어가 조금 서툴긴 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았다. 

목적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경험이 달라서일까.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애초에 다카마쓰에서 가까운 섬 나오시마는 빼고 오로지 시코쿠의 작은 도시들만 돌겠다고 마음 먹으니 모든 게 달리 보였다. 두번째 간 리쓰린 공원도 완전히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리쓰린 공원은 일본에서 특별명승지로 지정된 24개 정원 중에 가장 넓은 곳이다. 이 안에 6개의 연못과 13개의 인공 산이 있다.

리쓰린 공원 안의 몇몇 다실(茶室) 중 하나인 기쿠게쓰테이에서 말차를 마실 수 있다. 

리쓰린 공원 안의 몇몇 다실(茶室) 중 하나인 기쿠게쓰테이에서 말차를 마실 수 있다. 

처음 갔을 땐 바람이 부는 겨울이라 그런지 그저 잘 꾸며놓은 분재 속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런 느낌이 잘못된 건 아니다. 밤나무숲(栗林)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 곳은 소나무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데, 1400여 그루 소나무 중 1000여 그루가 전문가 손으로 다듬어진 분재송이니 말이다.

한국어로 공원 곳곳을 안내하는, 역시나 한류에 관심 많아 한글을 배우게 됐다는 아주머니 자원봉사자로부터 재미난 사연과 모양을 가진 각종 소나무 설명을 듣는 것도 물론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번엔 리쓰린 공원 안의 몇몇 다실(茶室) 중 하나인 기쿠게쓰테이(掬月亭)에서 일본식 정원과 연못을 보며 마신 말차가 일품이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같은 장소에서 말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때는 그림같은 풍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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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쓰린 공원 속 연못에선 뱃사공이 들려주는 해설을 들으며 뱃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리쓰린 공원 속 연못에선 뱃사공이 들려주는 해설을 들으며 뱃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그렇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림같은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원래 기쿠게쓰테이 바로 앞 연못에선 뱃사공이 모는 뗏목을 타고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번 방문 땐 세찬 바람 탓에 배가 뜨지 못했고, 풍경을 완성하는 연못 위 뗏목을 구경할 수 없었다.
이번엔 달랐다. 연못 위의 조각배 한 척, 아니 배를 탄 남녀 커플이 이 산수화에 완벽한 방점을 찍었다. 비록 인공으로 꾸민 것이라고는 하나 공원 안의 초록은 너무나 선명하고 매혹적이라 이곳에선 소나무와 정자뿐 아니라 사람까지 단번에 그림 속 주인공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리쓰린 공원을 가면 좋은 게 공원 뿐 아니라 공원 근처의 유명 우동 맛집까지 쉽게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가와현의 옛 이름은 사누키. '사누키 우동'의 고향인 이곳 가가와현 다카마쓰에서도 손꼽히는 우동 맛집인 우에하라야 본점. 

가가와현의 옛 이름은 사누키. '사누키 우동'의 고향인 이곳 가가와현 다카마쓰에서도 손꼽히는 우동 맛집인 우에하라야 본점. 

다카마쓰가 있는 가가와현의 옛 이름은 사누키(讃岐). 그렇다. 이곳은 그 유명한 사누키 우동의 고향이다. 비록 평소 우동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본 3대 우동의 하나인 사누키 우동은 한 번 맛봐야 하지 않겠나. 마침 리쓰린 공원 근처에 유명 맛집인 우에하라야(上原屋) 본점이 있다. 우동 온도와 국물 먹는 방식, 그리고 같이 먹는 튀김까지 직접 고르는 일종의 셀프 우동집인데, 가성비 좋은 곳으로 이름 높다. 우동도 우동이지만 튀김이 종류가 많고 맛도 좋다.

사누키 우동 맛집인 우에하라야 본점. 우동 온도와 국물 따르는 방식은 물론 같이 먹는 튀김과 어묵까지 전부 셀프로 고른다. 내 입맛엔 우동보다 튀김 맛이 더 좋았다. 

사누키 우동 맛집인 우에하라야 본점. 우동 온도와 국물 따르는 방식은 물론 같이 먹는 튀김과 어묵까지 전부 셀프로 고른다. 내 입맛엔 우동보다 튀김 맛이 더 좋았다. 

다카마쓰는 이렇게 매력적이지만 사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움을 발견한 곳은 사실 다카마쓰가 아니라 가가와현 동쪽 도쿠시마(德島)현에서였다. 전세계 명화란 명화는 모조리 카피해서 한 데 모아놓은 기발한 미술관이나 바다 속 소용돌이라는 기이한 자연현상. 여기에 연꽃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낯선 풍경까지.
이동 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연꽃밭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장관이었다. 서울에선 어디 고궁 연못에서나 볼 수 있는 연꽃이 도로 옆에 끝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도쿠시마가 원래 연근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차창밖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연꽃밭. 도쿠시마 특산품 중 하나가 이 연꽃밭에서 나오는 연근이다. 

차창밖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연꽃밭. 도쿠시마 특산품 중 하나가 이 연꽃밭에서 나오는 연근이다. 

사실 도쿠시마 나루토에 있는 오츠카국제미술관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산을 뚫고 지은 특이한 미술관이라는 점이 끌리긴 했지만 가짜를 돈 주고 보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도쿠시마현 나루토에 있는 오츠카국제미술관. 독특한 산 속 미술관이다. 

도쿠시마현 나루토에 있는 오츠카국제미술관. 독특한 산 속 미술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은 예상대로였고, 나머지 절반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오츠카 제약그룹이 창립 75주년을 기념해 1998년 설립한 오츠카국제미술관은 전세계 25개국 190여 개 미술관이 소장한 명화 1000여 점을 원본과 똑같은 사이즈로 재현해놓았다. 가령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을 그대로 갖다놨고, 사진촬영조차 금지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도 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의 감동 차이는 역시 클 수밖에. 게다가 미국과 유럽에서 꽤 많은 진품을 본 탓인지 사실 아무리 원본과 똑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딱 하나 흥미로웠던 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마주보는 자리에 복원 전 모습과 복원 후 모습을 같이 두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가도 이젠 복원 후의 '최후의 만찬'밖에는 볼 수 없지만,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 오츠카국제미술관에서 복원 전후의 작품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오츠카미술관에 있는 '최후의 만찬' 중 예수의 모습. 왼쪽이 복원 전이고 오른쪽이 복원후다. 

오츠카미술관에 있는 '최후의 만찬' 중 예수의 모습. 왼쪽이 복원 전이고 오른쪽이 복원후다. 

하지만 솔직이 이 미술관보다 나루토 소용돌이가 정말 흥미로웠다.
미술관 인근의 나루토공원 옆 나루토해협 한가운데의 나루토(鳴門) 소용돌이(渦潮·우즈시오)는 자연 그 자체의 신비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세계 3대 소용돌이 중 하나로 꼽힌다. 넓이 1.3㎞의 좁은 나루토해협은 조수 간만 차이 때문에 혼슈·규슈·시코쿠에 둘러싸인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와 나루토해협 급류가 만나는 곳에 최대 1.7m의 낙차가 생겨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그때 나타나는 게 바로 우즈시오다. 큰 조수일 때는 직경이 20m이상 달하기도 한단다.

이날은 제대로 된 소용돌이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느 바다와는 분명 다른, 마치 일본 우끼요에 한 장면 같은 흰 파도는 볼 수 있었다. 

이날은 제대로 된 소용돌이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느 바다와는 분명 다른, 마치 일본 우끼요에 한 장면 같은 흰 파도는 볼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나가 오나루토교 아래 잠시 머물러 소용돌이를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내가 갔던 7월초는 바다가 대단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진 않았다. 봄 가을에 밀물 썰물 수위 차이가 커 소용돌이 크기도 큰 데 이 날은 소용돌이 감상에 그리 좋은 날은 아니었다. 이렇게 날씨와 시간에 따라 소용돌이 세기가 달라진다.

3~4월, 시간만 잘 맞추면 오른쪽 같은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3~4월, 시간만 잘 맞추면 오른쪽 같은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소용돌이와 함께 장관을 이루는 오나루토교는 나루토(시코쿠)와 이와지시마(혼슈) 사이를 잇는 2층 다리다. 1985년 개통했는데 전체 길이는 1629m다. 위로는 차가 다니지만, 아래층에는 우즈노미치(渦の道)라고 사람이 관람할 수 있는 통로로 조성돼 걸으면서도 소용돌이를 구경할 수 있다.

나루토 소용돌이를 걸어서 볼 수 있는 오나루토교 아래의 우즈노미치.

나루토 소용돌이를 걸어서 볼 수 있는 오나루토교 아래의 우즈노미치.

나루토 소용돌이를 걸어서 볼 수 있는 오나루토교의 아랫층 구조. 

나루토 소용돌이를 걸어서 볼 수 있는 오나루토교의 아랫층 구조. 

꼭 소용돌이 감상이 아니더라도 해상 45m 위에서 보는 바다는 그럴듯하다. 우즈노미치 바닥엔 투명 유리가 깔린 조망대가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450m를 갔다가 갔던 길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인데 원래 철로를 만들려고 했서 그런지 기차역을 걷는 느낌마저 든다.

우즈노미치에는 이렇게 바닥을 투명 유리창으로 해놓은 조망대가 곳곳에 있다. 45m 아래 바다가 아찔하다. 

우즈노미치에는 이렇게 바닥을 투명 유리창으로 해놓은 조망대가 곳곳에 있다. 45m 아래 바다가 아찔하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다. 하나라도 더 열심히 미리 공부해야 낯선 곳을 더 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그저 새로운 자극에 스스로를 노출시켜 발견의 재미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닐까.
여행정보=에어서울이 인천~다카마쓰를 월·화·수·금·일 운항한다. 여러 항공사가 하루에도 몇 편씩 운항하는 간사이공항에서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다카마쓰에 가는 방법도 있다. 3시간30분 소요. 입장료는 리쓰린 공원 410엔, 오쓰카 국제미술관 3240엔, 나루토 관조선(원더 나루토) 1800엔, 우즈노미치 51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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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일본)=글·사진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나루토 소용돌이를 볼수있는 오나루토교의 우즈노미치에서 바라본 태평양. 

나루토 소용돌이를 볼수있는 오나루토교의 우즈노미치에서 바라본 태평양. 

 취재협조=일본정부관광국(J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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