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객석 점유율 98%…꺼져가는 불씨는 살렸는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9호 30면

“사람은 죽지만 춤은 살아 곁에 있고, 우리는 지금도 그 춤을 추고 있는 게야.”

국립무용단 ‘리진’ #기간: 6월 28일~7월 1일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문의: 02-2280-4114

살짝 동성애 느낌을 풍기는 조선의 마지막 궁중무희 리진과 도화, 아니 대한민국 국립무용단의 주역무용수 이의영과 장윤나의 애틋한 감정의 교차가 짧지만 짜릿하다. ‘3세대 무용극’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는 국립무용단 신작 ‘리진’의 오프닝에 기대가 부풀었다. 사람보다 길게 살아남은 춤이라-. 혹시 한국무용의 어제와 오늘을 함축한 무대를 보게 되지 않을까.

국립무용단이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무용극이라 더욱 귀추가 주목됐다. 김상덕 신임 예술감독이 “무용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언하며 직접 안무에 나섰다. 그는 신화와 설화, 굿 중심의 예스런 소재를 털어내고 “강렬한 드라마로 관객을 울리는 감동적인 무용극을 보여 주겠다”는 의욕을 밝히기도 했다. 존 크랭코의 ‘오네긴’ 같은 드라마발레 스타일이 나오지 않을까 점쳤던 이유다.

그런데 ‘리진’은 좀 더 나갔다. 바로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스타일이다. ‘안무가라기보다 스토리텔러’라 자처하는 매튜 본은 누구나 아는 고전에 현대적 콘텐트를 결합해 동시대 관객에게 어필하는 창조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유명하다. ‘백조의 호수’가 히치콕의 영화 ‘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심오한 심리극으로 거듭나거나, ‘호두까기 인형’의 배경을 ‘올리버트위스트’의 고아원으로 옮겨 현대사회를 풍자하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고딕소설 ‘드라큘라’와 영화 ‘트와일라잇’의 설정을 덧입혀 대중성을 끌어올리는 식이다.

김 예술감독도 창조적 스토리텔링을 감행했다. “무용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국적인 라 바야데르’를 고민하다 리진의 이야기를 접하고 각색에 돌입했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 텍스트 ‘리진’에 고전발레 ‘라 바야데르’의 컨셉트를 입히면서 그만 스텝이 꼬여버렸다. 구한말 격동기에 프랑스 외교관 플랑시의 사랑을 받은 리진의 이야기는 소설가 신경숙·김탁환에 의해 2000년대에 발견된 현대적 서사다. 여기에 권력자 원우와 질투의 화신 도화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더해 사랑과 욕망의 고전적 4각 관계를 완성한 것이다. 매튜 본 식 ‘고전 재해석’과는 정확히 역방향인데다, 리진의 이야기조차 낯선 상황에 가상의 캐릭터까지 더하니 혼란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리진과 니키아가 섞일 수 없는 건 구한말 여성 리진이 가진 역사성과 그녀가 2000년대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구 때문이다. 소설 원전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리진이 프랑스 공사의 구애를 받고 프랑스 사교계에까지 진출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어머니 같은 존재인 명성황후의 죽음을 따르는 이야기다. 마지막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를 조연으로 밀어내고 미천한 궁녀의 삶을 중심으로 서술한 이 역사의 번외편에는 근현대를 관통하는 민초들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구한말 조선과 프랑스, 고종과 명성황후라는 역사적 실체를 모두 추상화시켜 근본없는 판타지로 만든 무대에 ‘리진’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이유다.

춤은 어떨까. 무용극에서 기대하는 미와 기교가 집약된 솔로와 2인무, 버라이어티한 3인무와 4인무 등은 흔적만 남았다. 모든 장면에서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한 군무들은 많은 땀을 흘렸지만, 분절적이고 역동성이 강조된 ‘모던한’ 안무에 한국무용의 중심인 ‘호흡’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적 세트 없이 긴 활모양 LED 패널과 키네틱 프레임 몇개로 완성한 세련된 무대미술만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리진’에 현대판 무용극의 가능성은 있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초연부터 완성작을 기대하긴 어렵다”며 “각색을 걷어내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소설의 플롯을 살린다면 희망이 있다”고 평가했다. 플랑시로 상징되는 강요된 근대성과 명성황후로 상징되는 고결한 전통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던 리진은 전통적인 무용극과 미래지향적인 컨템포러리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국립무용단에 그 자체로 흥미로운 메타포가 된다. 춘앵무와 가인전목단 등 소설에 묘사되는 전통춤도 제대로 재현한다면 킬링파트가 될 수 있다. 그야말로 ‘한국무용의 어제와 오늘’을 포괄하는 것 아닌가.

명성황후라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플랑시와의 미래를 완성하지 못한 리진의 죽음이 결코 좌절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고결한 가치를 갈구한 것으로 해석되듯, 지금 완성도를 비난받는 무용극 ‘리진’의 운명도 결코 비극이 아니다. 98%의 객석점유율이 말해주듯, 대중의 외면을 받던 무용극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박물관에 갇힐 뻔한 무용극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실험의 시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무용단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