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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처럼 직장 얻고 결혼도.."나는 조현병 환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김진구 기자]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 금지를 골자로 한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이 시행 한 달을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5월 30일 시행된 이 법에 대해 일각에선 여전히 우려를 제기한다. 목소리를 내는 쪽의 논리는 이렇다. 치료를 다 하지 못한 정신질환자가 사회로 대거 쏟아져 나와 각종 범죄를 일으킬 거라는 주장이다. 특히 조현병 같은 중증정신질환에 대한 우려가 큰 편이다.


문제의 본질은 관리가 얼마나 적절하게 되느냐다. 병원에 입원한다고 반드시 관리가 잘 되는 것도, 퇴원한다고 관리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병이 깊을수록 각종 사회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조현병을 예로 들면, 병의 중등도와 관계없이 적절히 관리하면 무리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부산 금정구에 사는 최익선(38·가명·여)씨의 사례가 그렇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남들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큰 불편 없이 지낸다”며 “남편은 물론 직장에서도 (내가 앓는 병을) 알고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약만 잘 먹어도 문제없이 지낼 수 있어


최씨가 처음 병을 알아챈 건 16년 전인 스물두 살 때였다. 환청이 들렸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났다.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병원에선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치료는 쉽지 않았다. 최씨 본인조차 치료에 대한 의지가 크지 않았다. 입원 치료로 증상이 나아져 퇴원하고 나면 약을 빼먹고 재입원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증상은 더 심해졌다. 처음 서너 알이면 괜찮던 약이 스무 알까지 늘었다. 자살을 시도했던 것도 이때쯤이다.


다행히 위험한 상황에 이르기 전 최씨의 부모가 그를 발견했다. 부모님은 최씨를 나무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줬다. 최씨도 서서히 바뀌었다. 가족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일단 꼬박꼬박 약만 잘 챙겨먹자고 다짐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임의로 약을 줄이거나 끊지 않았다. 환청이 없는 날이 더 길어졌다. 동이 터오듯 표정과 목소리가 바뀌었다. 학창시절 때처럼 다시 쾌활해졌다.


조심스럽게 사회에 복귀했다. 꾸준히 약만 먹으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떠들 수 있었다. 직장도 구했다. 최씨는 현재 부산의 한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남자친구를 만나고 결혼도 했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 당시 남자친구가 당황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보호자이자 동반자로 최씨와 함께 하고 있다. 최씨는 “어려운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부모님과 남편의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기 집중 치료해야 효과↑·기간↓

전문가들은 조현병의 치료·관리에 있어 조기에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의학계에선 조기치료를 ‘증상이 처음 나타난 후 5년 이내’로 본다. 이때 적절한 치료를 받은 환자 10명 중 8명은 치료를 시작한 지 6개월 안에 망상·환각 같은 증상이 호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씨 역시 치료시기가 조금 늦긴 했지만, 집중적인 관리를 통해 증상을 수월하게 관리하는 사례다.


반대로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증상의 재발과 만성화로 이어진다. 문제는 적지 않은 환자가 조기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세계적인 조현병 유병률은 1% 내외다. 국내에도 약 50만 명이 앓는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조현병으로 병원 치료를 받는 환자는 20만 명에 그친다.

정신의료서비스 이용률(%)

그 원인으로 조현병뿐 아니라 정신질환 자체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매우 심각하다는 점이 꼽힌다. 보건복지부의 ‘2016 정신질환 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국내 정신의료서비스 이용률은 15.3%에 그친다. 미국(39.2%) 뉴질랜드(38.9%) 호주(34.7%)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양대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최준호 교수는 “정신질환도 신체질환처럼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히 관리해야 치료 효과가 높고 치료 기간이 짧아진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 및 사회복귀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정신보건서비스 이용 문턱을 낮춰 조기치료를 더욱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선진국선 24시간 응급진료·가정치료 시행

호주·영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선 조현병 환자가 조기 집중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영국은 2002년 ‘조기 정신질환 선언(UK Newcastle Early Psychosis Declaration)’ 이후 정신질환 조기개입 서비스(EIS), 국가 조기개입 프로그램(NEIP) 등을 운영 중이다. 24시간 응급진료, 가정치료, 일차진료, 연락 서비스, 가정 방문 보건활동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지난해부턴 정신질환의 조기 치료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5년간 1조7000억원을 추가 투입했다. 모든 병원의 응급실에서 24시간 정신질환 진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호주는 5년간 2400억원을 투입, 정신질환 조기 예방·중재센터(EPPIC)를 구축했다. 가정방문을 포함한 사례 관리, 심리치료·약물치료 등 종합적인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15~19세 젊은 환자의 정신 건강을 평가·치료하는 청년접근팀(Youth Access Team)도 운영 중이다.


실제 효과도 크다. 호주의 EPPIC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초발 조현병 환자를 374명을 7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조기 치료를 받은 환자는 증상이 50% 가까이 사라졌고, 사회 및 직업적 기능도 22% 이상 회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보건 예산 6분의 1 수준


한국 정부 역시 정신보건 분야의 예산과 정책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다만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아직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014년 기준 한국의 정신보건 관련 예산은 2500억 원 수준이다. 전년 대비 18% 증액됐으나, 국민 1인당 정신보건 예산으로 환산하면 미국(273달러)·영국(228달러)의 6분의 1 수준인 45달러 내외에 그친다.

주요 국가의 1인당 정신보건 관련 예산(2014년 기준, 단위:$)


결과적으로 정신의료 서비스의 질이 하락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실제 대다수 정신질환자는 심리상담 등의 치료를 받지 못한다. 약을 선택할 때도 환자 상태가 아닌 경제적 상황에 따라 처방할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지적된다.


최준호 교수는 “조현병 같은 중증 정신질환의 경우 조기부터 약물치료 및 사회심리 치료 등 통합적 치료가 적용돼야 하지만, 예산·인력·시스템 부재 등으로 많은 환자들이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환자의 경제적 상황이 아닌 의학적 판단에 따른 적절한 약물치료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환자라면 누구든지 장기지속형 치료제 같은 최신치료제를 처방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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