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감산해도 떨어지는 국제유가, 주범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중순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해상에 초대형 유조선(수퍼탱커) ‘사이크’호가 한동안 떠 있었다. 유럽인들의 휴가지로 유명한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남쪽으로 850㎞ 떨어진 지점이었다. 총 길이 330m의 거대한 유조선은 북해산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있었다. 영국 에든버러 인근 항구를 떠나 중국 톈진 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OPEC, 올초부터 하루 180만 배럴 감산에도 #국제 유가는 감산 이전 수준인 40~50달러 #채산성 높아진 미국 셰일 석유 증산이 원인 #감산 약속 안 지키는 OPEC 산유국도 한 몫 #유가 하락 지속하면 57년 역사 OPEC 해체될까

사이크호가 목적지를 잃고 헤맨 이유는 중국으로부터 거래 중단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새 고객을 물색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수퍼탱커들이 바다 위 저장고 역할을 하게 됐다. 유조선을 임차한 로열더치셸은 배를 다시 스코틀랜드 인근으로 불러 올려 선박 대 선박(ship-to-ship) 방식으로 원유를 옮겨 실을 계획을 세웠으나 이 마저 불발됐다. 유가 약세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2012년 3월 미국 텍사스주 엔시날 인근의 이글 포드(Eagle Ford) 셰일 유전 지대에서 근로자들이 파이프를 연결하고 있는 모습. [사진 블룸버그]

2012년 3월 미국 텍사스주 엔시날 인근의 이글 포드(Eagle Ford) 셰일 유전 지대에서 근로자들이 파이프를 연결하고 있는 모습. [사진 블룸버그]

산유국들의 잇따른 감산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2015년 이후 배럴당 30~60달러 속에 갇혀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에는 배럴당 40달러대에 주로 머물렀다. 유가가 맥을 못 추자 지난해 11월 말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들은 6개월 감산에 전격 합의했다. 감산 효과는 크지 않았다. 유가는 40~50달러를 벗어나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난 5월 말 당사국들은 감산 연장에 합의했다. 내년 3월까지 산유량을 하루 180만 배럴 줄이기로 했다.

두 차례 산유량 감축에도 불구하고 감산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 핵심은 미국의 셰일 유전이다. 셰일 석유 시추 기술이 발전해 OPEC에 견줄 만큼 원가 절감을 이룬 게 가장 큰 이유다. 골드먼삭스에 따르면 미국 셰일 유전의 원유 생산 원가는 배럴당 45~55달러 사이다. 국제 유가가 이 정도 선에 이르면 셰일 유전이 증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선에 이르자 미국의 셰일 원유 채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OPEC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이 산유량을 줄이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2년 전만해도 셰일 유전의 평균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70달러 정도였다. 2014년 11월부터 약 2년간 이어진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가격 전쟁’에서 살아남은 미국 셰일 석유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으로 무장하고 돌아온 것이다.

OPEC과 미국의 '석유 가격 전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래프. 2014년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시작되자 OPEC(흰색 선)은 원유 생산량을 늘렸다. 국제 유가를 떨어뜨려 미국 셰일 업계를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미국 셰일 석유업계(주황색 선)는 유가가 하락하자 생산량을 확 늘려 대응했다. [블룸버그] 

OPEC과 미국의 '석유 가격 전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래프. 2014년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시작되자 OPEC(흰색 선)은 원유 생산량을 늘렸다. 국제 유가를 떨어뜨려 미국 셰일 업계를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미국 셰일 석유업계(주황색 선)는 유가가 하락하자 생산량을 확 늘려 대응했다. [블룸버그]

셰일 유전의 장점은 전통적인 원유 채굴보다 생산 중단과 재개를 빠르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가가 내리면 생산을 중단하고, 유가가 오르면 즉시 생산을 재개해 원유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최근 OPEC이 산유량을 감축하자 미국이 즉각 셰일 석유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때마침 미국 정부가 원유 수출 금지법을 해제해 미국은 산유국이자 석유 수출국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 1~3월 미국의 원유 수출량은 OPEC 회원국인 적도기니ㆍ가봉ㆍ에콰도르 등 5개국보다 더 많았다. 지난 4년 간 수출량은 1600% 증가했다. 지난달 하루 90만 배럴을 수출했다.

‘석유 가격 전쟁’ 승자는 미국

그동안 원유를 둘러싼 OPEC과 미국의 관계는 복잡하게 변화해왔다. 로이터통신은 “처음엔 서로 무관심하다가 이후 격렬하게 싸웠고 이젠 대화의 길로 들어서려 한다”고 요약했다. 지난 5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정례회의에 미국의 셰일 석유 사업자들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OPEC 관계자들은 셰일 오일 생산지인 미국 텍사스주를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이 OPEC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것은 3~4년 전이다. 2013년과 2014년 미국의 셰일 석유 생산량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다. 미국의 산유량이 증가하면서 OPEC도 증산 경쟁을 벌인 결과 2014년 하반기 유가는 40~50달러선으로 곤두박질쳤다.

셰일 에너지 열풍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2012년 , 미국 중부지방에서 젊은 기술자들이 가스·원유를 채취하기 위해 퇴적암(셰일)층에 구멍을 뚫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셰일 에너지 열풍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2012년 , 미국 중부지방에서 젊은 기술자들이 가스·원유를 채취하기 위해 퇴적암(셰일)층에 구멍을 뚫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그해 11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가격 전쟁’을 선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장관이 OPEC 정례회의에서 “미국 셰일 붐을 꺾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OPEC은 하루 3000만 배럴을 생산해 공급 초과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유가를 40달러 선까지 떨어뜨려 셰일 오일업자들을 고사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생산 원감에 성공한 셰일 석유 사업자들은 살아남았고,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게 됐다. 원하는 만큼 산유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셰일 석유를 뽑아 오릴고 있다. 미국은 하루 935만 배럴을 생산하고 있다. 내년에는 1000만 배럴 이상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에너지 분석업체 FGE는 “미국의 셰일 석유 증산은 광기(madness)에 가깝다”고 했다.

자체 생산량이 늘면서 미국이 OPEC 국가에서 수입하는 원유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 1990년 미국에 수입된 OPEC산 원유는 62%를 차지했는데, 그 비중이 2015년 36%로 감소했다.

감산 약속 불이행도 유가 하락 원인

유가가 제자리에서 맴도는 또 다른 이유는 감산을 약속한 국가들의 이행률이 저조하다는 점이다. OPEC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 등 21개국은 올 1월부터 5월까지 하루 180만 배럴 감산을 합의했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블룸버그가 감산 실적을 집계한 결과 사우디아라비아ㆍ쿠웨이트ㆍ베네수엘라 등 8개국만 목표한만큼 감산을 실행했다. 러시아ㆍ이라크ㆍ카자흐스탄은 감산 목표치를 지키지 않았다. 2위 산유국인 이라크의 이행률은 65%에 그쳤다. 산유국들은 유가가 오를 듯하면 쿼터를 어기고 생산량을 늘려 유가 하락을 자초하고 있다.

감산이 면제된 국가들도 공급 초과의 원인이다. 나이지리아와 리비아는 증산이 공식 허용됐다. 리비아는 4년 만에 처음으로 산유량이 하루 100만 배럴을 넘어섰다. 내전으로 원유 생산에 한동안 차질을 빚은 것을 감안해 감산 합의에서 예외가 인정됐다. 나이지리아도 하루 200만 배럴을 생산하고 있다.

이처럼 공급이 줄지 않자 가격은 약세다. 최근 46달러대인 유가는 지난 해 말 감산에 들어가기 전 수준과 같다. 현재 OPEC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3221만 배럴이다. 당분간 공급 과잉 상태를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은 내년도 OPEC 회원국이 아닌 산유국이 하루 150만 배럴 증산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세계 석유 수요는 140만 배럴 증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유가 하락 지속하면 OPEC 해체될까  

내년 3월 추가 감산 약속이 끝나면 3차 감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추가 감산 주장은 OPEC 회원국이 아닌 산유국들이 적극적이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지난 2년 간의 강경 대응 자세에서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장관은 최근 “셰일 석유와 공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5월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례회의.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이 내년 3월까지 하루 180만 배럴 감산을 합의했다. [중앙포토]

지난 5월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례회의.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이 내년 3월까지 하루 180만 배럴 감산을 합의했다. [중앙포토]

만약 추가 감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OPEC의 존립 의미가 약화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OPEC이 카르텔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해체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OPEC은 1960년 설립돼 57년 간 산유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국제 유가를 조정해왔다.

유가는 내년에도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가 베어마켓(약세장)에 진입해 지금보다 30%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폴 씨아나 BOA메릴린치 기술 전략 헤드는 CNBC방송에서 “유가 하락은 절대적인 추세”라며 “지난해 4월 이후 최저치인 30달러대로 밀릴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