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3년 전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주도한 시몬 베이유 타계

중앙일보

입력

시몬 베이유가 1970년 유럽의회에서 투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몬 베이유가 1970년 유럽의회에서 투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53년 전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키며 여권 신장의 상징이 된 여성 정치가 시몬 베이유가 지난달 30일 타계했다고 프랑스 르몽드 등이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89세.
보건부 장관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1974년 11월 베이유는 낙태 합법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법안이 통과하기까지 두 달간 베이유는 언론을 비롯해 가톨릭 사제들, 법안에 반대하는 여성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여권ㆍ인권신장…프랑스 걸출한 여성 정치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첫 유럽의회 의장도 역임 #팔목엔 수인번호 문신

수년 간 찬반 논쟁이 지속된 이슈인데다 당시만해도 프랑스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자크 시라크 당시 국무총리는 법안을 외면했고, 법무부 장관마저도 반대했다. 베이유를 지지하는 이는 그를 발탁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정도에 불과했다.

1977년 보건부 장관 재직시절의 베이유. [AFP=연합뉴스]

1977년 보건부 장관 재직시절의 베이유. [AFP=연합뉴스]

하지만 베이유는 “지금도 상당수 의사와 시민들이 임신중절을 행하고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의원 한 명, 한 명을 설득했다. 특유의 추진력과 끈기로  결국 법안은 통과됐고, 베이유는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됐다.

파리정치대학원과 국립사법학교를 졸업한 베이유는 50년대 치안판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법률가였다. 법관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교정시설의 열악한 인권 상황 개선에 진력했다.

데스탱 대통령이 당초 항공산업에 종사한 베이유의 남편을 내각에 들이려고 자택을 방문했다가, 베이유와 대화한 뒤 그를 보건부 장관으로 발탁한 건 유명한 일화다.

베이유는 보건부 장관 재직시절 낙태 합법화 외에 사회보장제도 개혁, 금연 캠페인, 연구를 빌미로 한 의사들의 공공연한 환자 장기 적출 금지 등 전반적인 인권 개선에도 힘썼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2007년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베이유. [AFP=연합뉴스]

2007년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베이유. [AFP=연합뉴스]

베이유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수식어는 홀로코스트(나치 대학살) 생존자 출신으로 첫 여성 유럽의회 의장이다.

베이유는 17세이던 1944년 부모가 유대계란 이유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부모와 오빠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베이유와 다른 두 자매는 살아남았다.

그의 팔목엔 독일인이 새긴 ‘78651’ 수인번호가 문신으로 남았다. 이는 베이유가 유럽 통합에 앞장서고 온갖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된 원동력이 됐다.

베이유는 1979년부터 3년 간 유럽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강한 유럽연합(EU) 만들기에 앞장섰다.
수용소 탈출 후 자유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은 자서전 ‘삶’은 2007년 출간돼 스테디셀러가 됐다.

2010년 남편 앙트완 베이유와 함께 서 있는 베이유. [AFP=연합뉴스]

2010년 남편 앙트완 베이유와 함께 서 있는 베이유. [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일 트위터에 “베이유 여사는 프랑스인에게 사표(師表)였다”고 애도했고, 데스탱 전 대통령은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 특별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베이유의 유족으로는 2013년 별세한 남편 앙투완 베이유와의 사이에 둔 세 아들이 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