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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성 “소설 이용한 반당활동은 대발명” 마오에게 쪽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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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36>

1 시중쉰에 대한 심사와 박해는 문혁시절에도 계속됐다.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는 시중쉰. 1969년 가을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1 시중쉰에 대한 심사와 박해는 문혁시절에도 계속됐다.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는 시중쉰. 1969년 가을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중공 윈난(雲南)성 서기 옌홍옌(閻紅彦·염홍언)은 당사(黨史)에 정통했다. 서북 출신이며 군 계급도 우리의 대장 격인 상장(上將)이었다. 혁명시절 서북에 있었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신문에 일부 연재되던 리젠퉁(李建彤·이건동)의 소설 『류즈단(柳志丹)』을 읽으며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오 “근래 문학 이용한 반혁명 활동” #정직 당한 쉬중신 말 한마디도 안 해 #저우언라이 “주석은 널 신임” 위로

옌홍옌은 베이징 온 김에 리젠퉁을 수소문했다. 만나서 낯만 붉히다 헤어졌다. 성격이 불 같은 옌홍옌은 시중쉰(習仲勛·습중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분이 언잖다 보니 따지듯이 물었다. “똑바로 얘기해라. 리젠퉁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류즈단을 소설로 쓰는 거 알았냐 몰랐냐?” 완전 시비조였다. 시중쉰도 짜증이 났다.

“1960년 이전까지는 찬성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의했다. 원고를 유관 동지들에게 보내 틀린 부분 지적 받고, 의견 구한 후에 출간하라고 했다. 리젠퉁을 다시 만나라. 참고될 얘기 해줘라.” 옌홍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고집센 여자 처음 봤다. 꼴도 보기 싫다.”

소문을 들은 캉성(康生·강생)은 보물을 건진 기분이었다. 소설은 보지도 않고 선전부에 요구했다. “시중쉰이 기획한 『류즈단』은 말이 소설이지, 반당강령이다. 신문연재를 중단하고, 출간허가도 취소해 주기 바란다.”

2 “시중쉰 심사위원회” 주임 시절의 캉성 . 1964년 봄, 베이징.

2 “시중쉰 심사위원회” 주임 시절의 캉성 . 1964년 봄, 베이징.

시중쉰은 당 중앙에 편지를 보냈다. 결백을 호소했다. “나는 소설 『류즈단』의 집필을 주재하지 않았다. 캉성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편지는 효과가 없었다. 비판이 줄을 이었다. 시중쉰의 회고를 소개한다. “캉성은 이론의 권위자였다. 무리를 선동해 나를 공격했다.”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휴가를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당분간, 회의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 내 잘못을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가 되면 실책에 관한 조사를 받겠다.”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에게 호의적이었다.

저우언라이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당 중앙도 시중쉰의 휴가를 승인했지만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 전체 회의가 열렸다. 발언대에 선 마오쩌둥은 캉성이 보낸 쪽지를 펼쳤다. “소설을 이용한 반당활동은 보기 드문 대 발명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쪽지를 읽은 마오쩌둥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근래에 문학 작품을 이용한 반혁명활동이 진행 중이다. 소설을 이용한 반당, 반인민 행위는 창당 이래 최대의 발명품이다. 한 정권을 뒤집어엎으려면, 여론 조성과 의식형태에 관한 공작을 먼저 펼쳐야 한다. 혁명도 그렇고, 반혁명도 마찬가지다.” 말미에 캉성을 치켜 올렸다. “캉성 동지가 소설을 이용한 반당활동을 발견했다.”

3 옌홍옌(왼쪽 첫째)은 역전의 맹장이었다. 부하들을 아끼고,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소설 때문에 시중쉰에게는 한때 불만이 많았다. 1963년, 윈난성 서기시절의 옌홍옌. [사진 김명호 제공]

3 옌홍옌(왼쪽 첫째)은 역전의 맹장이었다. 부하들을 아끼고,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소설 때문에 시중쉰에게는 한때 불만이 많았다. 1963년, 윈난성 서기시절의 옌홍옌. [사진 김명호 제공]

‘시중쉰 심사위원회’가 발족했다. 주임 캉성이 중앙에 건의했다. “시중쉰은 무슨 회의건 참석할 필요가 없다. 국경일에 천안문(天安門) 성루(城樓)에도 못 올라오게 해야 한다.” 위원회 1차 회의에서 캉성은 할 일을 설명했다. “앞으로 우리는 시중쉰 반당집단의 활동을 연구하고 심사해야 한다. 적당한 시기에 보고문을 당 중앙 전체회의에 제출할 예정이다.” 묵묵부답, 아무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심사 과정도 비밀에 부쳤다.

당 전체 회의에서 캉성은 시중쉰의 죄상을 나열했다. “소설 『류즈단』은 당의 위대한 역사를 위조했다. 산간변구(陝甘邊區)가 중국 혁명의 중심(中心)이며 정통(正統)이라고 단정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류즈단 사상으로 둔갑시켜, 그들의 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삼으려 했다.”

시중쉰에게 정직(停職) 처분이 내렸다. 문건을 압수하고, 회의 발언기록도 없애 버렸다. 소설의 작자 리젠퉁도 온전치 못했다. 당적(黨籍)을 박탈당하고, 노동에 종사하라는 처분을 받았다.

시중쉰은 집밖을 나오지 않았다. 나가도 갈 곳이 없었다. 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을 성실히 보좌하던 시중쉰이 자살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 직접 찾아갔다. “그간 너는 정부를 대신해 많은 일을 했다. 마오주석은 여전히 너를 신임한다. 잘못은 고치면 된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사이다. 부디 딴생각 품지 마라.” 시중쉰도 저우언라이를 안심시켰다. “농촌에 내려가 농민생활 하고 싶다. 고관 노릇 하려고 혁명에 뛰어들지 않았다. 땅 갈고 씨 뿌리는 것도 혁명이나 진배없다.”

마오쩌둥의 신임이 여전하다는 저우언라이의 위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수십년 간 시중쉰에 대한 마오의 평가는 후했다. 1935년 10월 중순, 장정도중 산시성과 간쑤성 경계를 통과하며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장시(江西)성을 출발, 10개 성을 거치며 산시(陝西)성 경내에 들어섰다. 우리 근거지가 어디에 있느냐? 이제 거기가 우리 집이다. 류즈단과 시중쉰이 근거지를 마련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갈 곳이 없을 뻔했다.” 그후에도 비슷한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시중쉰은 힘이 솟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그러건 말건, 캉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앙선전부와 중국작가협회에 지령을 내렸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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