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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경찰이 헬기 훔쳐 대법원 공습 "영화 같은 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베네수엘라 대법원 헬기 탈취 공습 사건의 주인공 오스카르 페레스. [사진=오스카르 페레스 인스타그램]

베네수엘라 대법원 헬기 탈취 공습 사건의 주인공 오스카르 페레스. [사진=오스카르 페레스 인스타그램]

전직 경찰이 경찰 헬기를 훔쳐 대법원을 공습하는 영화같은 일이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졌다. 이는 반정부군의 소행일까, 아니면 정부의 자작극일까. 반정부 시위가 3개월째 이어지며 격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심장을 겨냥한 초유의 사건을 두고 루머가 횡행하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 등이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공습을 감행한 오스카르 페레스가 시위대의 영웅으로 떠오른 가운데, 정부가 여론을 돌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반정부 시위에 기름을 부을 것으로 보인다.

70명 죽고 1000명 사상,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 가운데 #전직 정부 헬기 조종사 겸 영화배우가 수류탄 떨어뜨려 #"드론 비행도 금지된 곳에 경찰 헬기가 어떻게 날았을까"

베네수엘라 정부에 따르면 헬기는 27일 오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상공을 맴돌다 내무부 청사에 총격을 가한 뒤 대법원에 수류탄을 투하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 따르면, 수류탄은 모두 콜롬비아 부품을 조립한 이스라엘제로 모두 4발이었으며 그중 하나는 불발됐다. 사상자나 눈에 띄는 피해는 없었다. 페레스는 '헌법 350조, 자유' 현수막을 내걸고 공습을 감행했다.

"범죄 정부 처벌하러 나섰다" 

페레스 인스타그램 영상 캡처.

페레스 인스타그램 영상 캡처.

사건 발생 후 군복 차림의 페레스는 “우리는 군인, 경찰, 시민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이라며 “마두로의 폭압에 항거하고 ‘범죄 정부’를 처벌하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하는 5개짜리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5개 영상의 누적 조회수는 하루만에 2300만회를 넘겼다. 시민들은 "당신은 훌륭한 애국자"라는 등의 댓글을 달며 열광했다.

페레스는 특수경찰 파일럿 출신으로 2015년 '서스펜디드 데스'라는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납치된 희생자를 구출하는 역할이다. 그는 영화 홍보차 현지 TV 방송과 인터뷰 하면서 "나는 헬기 조종사, 전투 다이버이며 또한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배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부 외신은 그를 '베네수엘라의 람보'라고 표현했다.

마두로의 자작극? 혹은 진짜 애국자?

페레스가 출연한 '서스펜디드 데스' 화면 캡처. [AFP=연합뉴스]

페레스가 출연한 '서스펜디드 데스' 화면 캡처. [AFP=연합뉴스]

사건 발생 당시 대통령궁에서 생방송으로 친정부 성향 언론과 대담 중이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현 정권을 흔들려는 테러 공격”이라며 “큰 인명피해가 날 뻔했다. 즉시 대공방어 체제를 가동하고, 테러를 감행한 이들을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엘 아이사미 부통령도 "우리는 이 미치광이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를 찾아내기 위해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페레스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력을 배치했으며, 문제의 헬리콥터는 캐리비안 해변의 외딴 지역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페레스가 어떻게 경찰 헬기를 탈취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드론 비행조차 금지된 주요 국가 기관 청사 위를 어떻게 헬기가 비행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베네수엘라의 반정부 시위 사상 가장 충격적인 이 사건이 정부의 자작극일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장기화된 반정부 시위에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연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헬기 공습 사건이 TV에서 요란하게 보도되는 동안 친마두로 인사들이 장악한 대법원은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루이사 오르테가 법무장관의 지위를 박탈하고, 친 마두로 인사인 타레크 윌리엄 사브를 후임으로 임명하는 두 건의 판결을 승인했다.

훌리오 보르헤스 베네수엘라 야당 원내대표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에선 조작된 거라 하고, 일부는 진짜라고 한다"면서 "간단히 말하면, 국민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동안 정부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극심한 경제난과 독재로 고통받는 베네수엘라

"최루탄 對 배설물 새총".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지난 3월 반정부 시위대가 최루탄을 쏘는 경찰을 향해 새총을 쏘고 있다. 새총으로 날린 병 안에는 배설물이 들어 있었다.  [AP=연합뉴스] 

"최루탄 對 배설물 새총".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지난 3월 반정부 시위대가 최루탄을 쏘는 경찰을 향해 새총을 쏘고 있다. 새총으로 날린 병 안에는 배설물이 들어 있었다. [AP=연합뉴스]

방독면을 착용한 채 자욱한 최루가스를 뚫고 시위를 진압하는 베네수엘라 경찰. [AFP=연합뉴스]

방독면을 착용한 채 자욱한 최루가스를 뚫고 시위를 진압하는 베네수엘라 경찰. [AFP=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전 국민적 시위가 석 달째 이어지는 가운데 발생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대법원이 마두로 정권을 유지시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며 반발해왔다.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지난 3월 29일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가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렸다. 의회를 무력화하면서 삼권분립 원칙을 깼다는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자 철회하긴 했지만 시민들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 판결을 계기로 시작된 시위를 베네수엘라 정부가 무력 진압하면서 갈등은 장기화됐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720%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돈 가치가 없어져 지폐의 무게를 달아 물건을 사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다. 거기에 더해 식량난, 의약품 부족으로 나라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 체재를 강화하고 있는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현재까지 70명이 넘게 사망하고 1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지난 19일엔 17세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시위대의 분노도 격화됐다. 페레스의 헬기 공습이 마두로 정권의 자작극임이 확인된다면 분노한 시위대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반대로 애국심으로 행한 일이라 해도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지금까지는 최루탄과 고무총 나아가 살상무기로 무장한 진압 경찰에 돌과 나무방패, 오물총으로 저항해왔지만 페레스 같은 전직 경찰이 살상무기로 정부와 맞선다면 그야말로 '내전'이 시작되는 셈이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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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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