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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장원> 

낙조 전망대에서  
-김승재

엄매엄매 큰일 났네
세방 갱본* 불붙었네
목선도 가두리도
훌렁 다 타고 있네
대번에 덮어쓴 불길
우덜 모도 어짜라고

다잡어 갈매기 놈
섬 넘어 내빼불고
동석산 돌종 천개
다급하게 울어싸타
종성굴 뻘건 쐿물이
끓어서 넘는당께

다 타고 까만 재만
사방에 널어놨네
섬덜도 얼척없어
암말도 못 한당께
보랑께 초승달 빼꼼
앙큼한 것 묘하네

(*전남 진도군 지산면 세방 바다)

◆김승재

1954년 전남 진도 출생. 현대자동차 정년퇴직. 용두레수석회 부회장. 5년 전부터 『현대시조 창작강의』와 인터넷으로 시조 독학.

<차상>

천리만리 이야기
-김견숙

비로소
백지 양면에
푸른 시간이 깃든다.

수백 킬로미터 오랜 숲이 드리우는 흰 갈망

그 위로
미끄러지는 얘기
천리 길을
걷는다.

<차하>

유배길에 서서
-김향숙

멀리도 따라온 시름
죽림에 재워둔 날
천리 길 하늘 아래
별비가 내린다
물소리 길 잃은 여기
먼 빛이 와 덮는다

오래고 긴 기다림 다시 추스르며
품어온 봉인된 글발, 문득 그어 본다
절벽에 떠오르는 초상
윤슬 속에 가뭇하고

물빛 너머 아련한 어머니 치마폭
보자기에 싸여진 꼿꼿한 사초(史草)는
유배의 파도를 베고 벼랑을 돌고 있다

<이 달의 심사평>

지역설화 빗대 해질녘 묘사 … 언어 부리는 솜씨가 수준급  

가뭄에 타드는 유월 어디서나 마른 흙먼지가 피어오르는데, 목을 넘기지 못하고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말들이 기어이 작품으로 쏟아진 걸까. 이번 달에는 다양한 개성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다.

김승재의 ‘낙조 전망대에서’를 장원으로 올린다. ‘세방 갱본’에 노을이 물들고 어둠이 오는 풍경을 감성적인 언어로 풍성하게 쏟아놓은 작품이다. ‘동석산 돌종’ 소리와 같은 지역 설화를 끌어들여 놀빛이 타는 현존의 시점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다만 상당량을 차지하는 지역 방언의 사용은 정서적으로 일체화된 가락을 빚어내는 효과는 있으나, 의미 전달 면에서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할 것이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가 당선작의 뒤를 받쳐 주었다.

차상으로 선한 김견숙의 ‘천리만리 이야기’는 시상의 단정함이 돋보인다. 장원 작품이 경관에서 오는 황홀감에 압도되어 있다면, 이 작품은 내면의 평지 위에 풍경을 작도(作圖)하고, 그 위에 천리 길을 들여놓고 걷는 깔끔한 전개구도를 보인다. ‘오랜 숲이 드리우는 흰 갈망’은 글쓰기의 내면화 과정에 처한 화자의 물리적인 현실로도 읽힌다. 평이한 결론을 상기시키는 정도에 머문 듯한 종장은 아쉬움이 남는다.

차하로 뽑은 김향숙의 ‘유배길에 서서’는 입상작 중에서 가장 안정감 있게 시조의 틀을 갖춘 작품이다. 서포 김만중을 주체로 하여 유배에서 오는 고독과 그리움의 심상을 남해 섬의 배경과 겹쳐놓은 묘사가 무리 없이 차분하다. 그러나 유배지 시편들은 기존에 너무 익숙하게 보아 온 소재인 터라 상대적으로 신선미가 떨어질뿐더러, ‘죽림’이나 ‘사초’ 같은 시어들은 더욱 그렇다. ‘그어 본다’ 도 의미가 걸리는 부분이다.

끝까지 거론된 윤병석·안천근의 작품은 대상을 천착하는 힘이 돋보였으나 설경미·김성이·정하선 등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심사위원 : 박명숙·염창권(대표집필 박명숙)

<초대시조>

그대 이름은
권영희

예초기가 바싹 지나가고 나서야
짙은 네 향기도 수런수런 피어났다
이 너른 들판의 주인이 너였음을 알겠다

하루하루 흔들리고 남은 날 위태로워도
거칠고 가파른 길 온전히 살아야 하는
그대는 슬픈 비정규직 풀이라고 부른다

◆권영희

1964년 안동 출생. 2007년 ‘유심’으로 등단. 시조집『오독의 시간』, 현대시조100인선『달팽이의 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풀이 자란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푸르게 풀은 자라나 온 들판을 무성히 뒤덮는다. 목숨 가진 것들의 가장 아래쪽에서 목숨을 건 풀의 한 생이 짙은 향기로 수런수런 피어난다. 모질게 베어낸 자리, 비로소 풀의 부재가 풀의 존재를 일깨우는 순간, 시인은 풀이야말로 이 들판의 주인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는 슬픈 비정규직 풀이라고 부른다'고 풀의 이름을 불러준다. '요즘은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라는 1888년 4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처럼, 기층민인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통해 인간애와 구원이라는 가치로운 삶의 의미를 혼신으로 천착했듯이 이 시인 역시 풀의 상상력을 통해 온 들판의 뿌리인 민초를 아름답게 인식해낸다. 민초 중에서도 '하루하루 흔들리고 남은 날 위태로워도' 소외와 무관심으로 실존의 위기를 겪는, 그리고 '거칠고 가파른 길 온전히 살아야 하는' 고난과 시련의 삶의 현장에 내몰린 ‘비정규직’의 아픔과 열망을 그려내고 있다. 풀은 들판이 있는 한 항구히 삶을 꿈꾼다. 단 한 줌의 흙이 허락된 곳이면 어디라도 그 끈질긴 생존본능은 땅을 잡고 뿌리를 내릴 것이다. 우리도 시인과 함께 풀의 이름을 불러주자, 따스하고 간절한 호명이 이 들판을 더욱 무성한 푸르름으로 덮을 때까지. '그대 이름은 아름답고 신성한 생명의 뿌리, 풀!' 이라고.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전 응모자격을 줍니다.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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