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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5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장원>  

시래기 덕장  
-조영애

1.
줄줄이 걸려 있는 양구덕장 저 시래기
햇빛이 지날수록 주름살이 늘어나고
건들면 바스러질 듯 제 살 삭혀 앙상하다

2.
내줄 것 다 내주고 제 몸마저 벗어주고
시래기 걸친 노인들 찬바람 맞고 서 있다
어쩌나! 파고다 공원 슬픈 눈들 멀뚱하다

◆조영애

1958년 충남 은진 출생. 동국대 국문과. 전 은광여고·삼괴중고 국어교사. 전 수원여자대 유아교육과 동시·동화 창작 지도교수. 현재 시낭송·동화구연 강의. 시조 읽고 암송하며 독학.

<차상>  

아마도  
-정두섭

1.
말리고 말린 살 야무지게 뼈에 붙였다
줄어들 거 더 없어서
아마도를 찾아간다
거기에
있기는 있는 걸까, 지도에는 없는 섬

2.
밥 먹어 부르던 곳 이쯤 저쯤 몰라서
풋사랑 분홍 터진 보리밭도 몰라서
저기요, 길 잃고 길 묻는다
아마도가 어딘가요

햇볕줄에 걸린 바람 길 터서 보내주던
노파의 손가락 끝
수몰 지구 한가운데
그림자 십여 그루가 반나마 젖고 있다

3.
해종일 걸어 걸어 산등성이 겨우 넘어
어림짐작 고향 땅에 마음 한 척 닻 내릴 때
남은 볕 흩뿌리는 서녘, 희고 붉은 아마도

<차하>

개복치  
-박한

도려 진 살점 앞에 순한 눈 지느러미
아리고 비린 가슴 기억을 뒤로 한 채
어시장 난전 위로는 발자국만 넘친다

발목 잠긴 생의 뒤란 목숨에 저당 잡혀
조각난 그리움을 무두질로 달랬었지
촉 낮은 비릿한 꿈이 사리로 빚어지는

굳은 살 박힌 등짝 거스러미 재우다가
바람 칼 이고 서서 아픔 꾹꾹 다지며
한 평생 가시를 삭여 또 한세월 건넌다

<이 달의 심사평>

시래기와 노인 모습 얼비쳐 … 쇠잔한 풍경 담담하게 그려 
녹음이 짙어진 5월의 끝이다. 푸른 불길이 지펴진 생명의 숲에서 애써 쇠잔한 삶의 형상을 돋워내는 예비시인들을 만난다. 우선 조영애·정두섭·박한 등의 작품이 각축을 벌였다. 장원으로 올린 조영애의 ‘시래기 덕장’은 함께 보내온 ‘제비꽃 한나절’과 함께 시상의 단정함이 돋보였다. “양구덕장”의 “시래기”와 “파고다 공원”의 “슬픈 눈들”이 병치되면서, 사물의 이야기가 몸의 서사에 겹쳐진다. 말라가는 “시래기”에 “노인들”의 모습을 얼비치게 하여 쇠잔한 풍경을 환기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차상으로 올린 정두섭의 ‘아마도’는 말을 앞세워 의미를 구성하는 힘이 돋보인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서 보듯, 말의 재미에 빠져 산만해질 수 있다. 여기서 ‘아마도’는 “지도에 없는 섬”이자 노년의 회상이 닿는 곳으로, 인생사의 축약본이라 할만하다. “길 잃고 길 묻는다”고 했을 때 자기 의지로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이며, “희고 붉은 아마도”는 생의 종착역에 대한 막연한 추측이 아니겠는가.

차하로 올린, 박한의 ‘개복치’는 시조의 정공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려 진 살점” “비린 가슴” “조각난 그리움” 등은 삶의 형상을 떠올리는 장치이다. 어시장 좌판에 놓여 있는 “개복치”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네 삶도 “가시” 박혀 난전을 떠도는 처지와 다름없음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끝까지 남은 남윤혜의 작품은 시선의 발랄함이 눈에 띄었으나 결구 처리에 허술한 틈이 보여 안천근·남궁증·고경자 등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박명숙·염창권(대표집필 염창권)

<초대시조>

누이감자
-권갑하

잘린 한쪽 젖가슴에 독한 재를 바르고
눈매가 곱던 누이는 흙을 덮고 누웠다

비릿한 눈물의 향기
양수처럼 풀어놓고

잘린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순처럼
쪼그라든 시간에도 형형한 눈빛은 살아

끈적한 생의 에움길
꽃을 피워 올렸다

허기진 사연들은 차마 말로 못하는데
서늘한 눈매를 닮은 오랜 내력의 깊이

철없이 어린 꿈들은
촉을 자꾸 내밀었다

◆권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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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경북 문경 출생. 92년 조선일보·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중앙시조대상·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시조집 『 세한의 저녁』 『외등의 시간』 『아름다운 공존 』 등. 한양대 문화콘텐츠학 박사. 농협중앙회 도농협동연수원 원장.

감자꽃 만발한 5월이다. 꽃샘추위 무릅쓰고 이른 봄에 씨감자를 심었던 이랑은 이제 소담한 꽃밭이 되었다. 24절기 중 청명 이전까지 심은 씨감자는 감자 순이 누렇게 마르는 100일 이후에 캐게 된다. 전통적인 구황작물인 감자에서 시인은 가난과 생존이라는 삶의 지난한 흉년을 버티어낸 슬픈 희망이었던 우리들의 그리운 누이를 본다. 누이는 씨감자가 되어 땅에 묻히고 주렁주렁 새 생명들을 키워 올리게 되는 것이다.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유방암으로 숨진 어느 누이의 처연한 삶”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모성 중에서도 어머니보다 더 친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우리들의 누이는 그렇게 저 척박한 지난시대 너나없이 희생과 헌신의 이름 없는 씨감자가 되어야 했다. “젖가슴”과 “양수”라는 모성적 분만의 상상력을 통해 “흙을 덮고 누운” 죽은 누이와 잘라서 심은 씨감자는 한몸인 ‘누이감자’가 된다. 누이감자의 “쪼그라든 시간”은 “새순”과 “꽃”으로 재생하게 되고, 누이감자의 “허기진 사연들”은 결국 “철없는 어린 꿈들의 촉”으로 새로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눈매가 곱던 누이”는 씨감자의 “눈물의 향기”로, 감자꽃의 “형형한 눈빛”으로, 땅속 깊은 새 감자의 “서늘한 눈매”로 환치되면서 ‘누이감자’는 생명과 생명사이의 유관성에 바탕을 둔 단순한 생태시의 범주가 아니라, 참다운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로 우리 가슴에 심어진 소중한 한국정형시의 씨감자임을 깨닫는다.

박권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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